(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유동성 위기에 처한 대형 투자은행들이 맥없이 쓰러지면서 미국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서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16일 정책금리를 동결, 시장을 당분간 관망키로 했다.
금융시장의 혼돈에 따른 경기하강의 위험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여전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취한 조치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과 메릴린치의 매각, AIG의 유동성 위기 등으로 15일 다우존스산업평균 지수가 500포인트 이상 폭락하며 금융시장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일부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는 FOMC가 이날 금리를 0.25%포인트 혹은 0.50% 인하할 것이라는 관측이 대두됐지만 FOMC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이번에 금리를 내리지 않더라도 향후 금리인하를 예고하는 확실한 시그널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실제 나온 발표문에는 이런 신호가 거의 감지되지 않았다.
이는 이번 금융위기의 본질이 신뢰의 상실에 따른 문제이지, 금리인하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간접적인 메시지를 FRB가 시장에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금리 조기인하설 일단 일축
이번 FOMC 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장의 전망은 `연말까지는 금리 동결, 내년 초 금리 인상 검토’가 정설이었다.
세금환급에 따른 소비지출 확대 효과가 곧 사라지고 3.4분기와 4.4분기에 성장률이 다시 둔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내년 이후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질 것에 대비, 금리를 올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4일 리먼브러더스의 매각협상이 결렬, 파산보호 신청쪽으로 결론이 나고 메릴린치가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인수되면서 금융시장이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들면서 분위기는 `금리 동결’도 아닌 `조기 금리인하’쪽으로 급반전하는 양상이 됐다. 특히 월가에서는 금리인하 폭이 0.25%가 아닌 0.50%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하지만 FOMC는 금리를 연 2.00%인 현 수준에 그대로 묶어 두면서 향후 금리정책 방향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 시장의 기대를 무색케했다.
이번 금리동결은 리먼브러더스에 대해 미 재무부가 보여준 태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리먼의 회생을 위해 정부가 구제금융을 단행하지 않겠느냐는 예측도 있었으나 미 재무부는 민간 투자은행의 부실을 메우기 위해 납세자의 부담을 지울 수 없다는 확고한 입장을 천명했던 것 처럼, 금융회사들의 신뢰상실로 인해 야기된 시장의 혼돈을 정책금리 인하로 해결할 수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금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다
실업률이 여전히 높고 소비지출도 둔화되는 등 경기의 하강리스크가 커짐에 따라 금리를 낮춰 경기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금리인하로 경기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찮다.
FRB는 작년 하반기에 연 5.25%였던 정책금리를 2.00%까지 급격하게 낮췄지만 시장에 돈줄은 여전히 말라 있는 상태다.
FRB의 대출 창구의 문턱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낮춰, 은행이 보유한 채권이 정크본드가 아닌 한 언제든지 담보로 잡고 FRB의 자금을 빌릴 수 있는 상황이다.
또 시장의 단기금리가 급등하지 않도록 막대한 유동성 공급을 계속하고 있지만, 신뢰가 무너진 부분에는 자금이 공급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모하게 위험을 감수한 투자로 부실을 키워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금융회사들의 유동성 위기를 정책금리 인하로 해소할 경우 모럴해저드를 조장하는 셈이다.
현재의 금융시장의 위기를 정책금리 인하로 풀 사안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는 채권시장의 금리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다.
연 2%라는 저금리 기조로 인해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해졌으나 이 유동성은 국채 등 안전자산쪽으로 몰리고 있는 반면 신뢰가 무너진 모기지 시장에서 금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따라서 FRB는 금융시장의 동요로 인해 당분간 금리인상의 가능성은 약화됐지만 그렇다고 당장 금리인하로 선회할 만큼 시장이 급박하지 않을 뿐더러 실제 금리를 인하하더라도 그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저금리의 폐해 반복 곤란
벤 버냉키FRB 의장의 별명은 `헬리콥터 벤’이다. 금리를 0%까지 낮춰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여지가 없는 지경이 될 경우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내 헬기로 마구 뿌려대는 한이 이었더라도 경기를 부양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FRB는 0%까지 금리를 낮출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아니 현재의 연 2% 금리 수준을 사실상 최저수준으로 보는 듯 하다.
물론 여기서 금리를 좀 더 낮출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경기를 부양할 수 있는 효과는 극히 제한적이며 오히려 저금리의 폐해만을 키울 뿐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요약되는 현재의 금융위기는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의 재임때 연 1%의 저금리가 장기간 지속된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저금리에 대부분의 가계가 앞다퉈 대출을 받아 소비하고 상환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주택을 구입하는데 열중, 결국 주택시장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현재의 금융위기가 초래됐다는 것이다.
또 투자은행들도 저금리로 인해 수익률이 한계에 이르자, 단기금융시장에서 조달한 돈으로 장기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위험을 감수하다 제 무덤을 파고 말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FRB는 저금리 정책의 유산을 하루 빨리 청산하고 가능한 한 현수준보다 금리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장의 금리인하 요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부양이 이뤄진다는 확신만 있으면 금리를 낮추겠지만 현재는 그런 단계가 아니라는 FRB의 판단이 이번 금리동결 결정과 발표문으로 확연히 드러났다.
s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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