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마당 길 한 귀퉁이에 머쓱하게 분홍빛 백일홍 한 그루가 화분에 담겨 있다. 아침 출근길과 퇴근길에 흘낏 쳐다보아 흙이 마른 것 같으면 얼른 물 한 바가지 끼얹는다. 노인아파트에 사시는 어머님이 화원에서 구입했는데 아파트 실내에서는 잘 자라지 않아 시들시들하다고 나에게 들려준 화분이다.
자랄 때 마당 가장자리에 피어 있던 백일홍을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백일홍’이란 이름을 가만히 소리 내어 되뇌어 본다. 아련한 어릴 적 추억이 자꾸만 피어오른다.
여름이 한창일 때 앞마당에서는 백일홍이 어김없이 피었다. 증조할머니께서 초여름에 백일홍 모종을 구해 와서 심으셨다. 채송화, 봉숭아꽃, 사르비아 등과 함께 쉽게 구할 수 있는 모종이라 어느 집 마당에서나 볼 수 있던 꽃이다.
증조부의 네번째 아내였던 증조모는 조부의 두번째 부인이셨던 할머니보다 나이가 더 아래였고 슬하에 친자식은 없으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은 증조모와 성장기를 보냈다.
증조모와 함께 살던 우리 집은 집안의 큰 어른이 계셨으므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문안인사 차 들르는 친척의 발길이 잦았다. 부모님께서는 집안의 모든 대소사는 당연히 증조할머니의 의견을 물어보아 치르고, 궁핍한 시절의 소찬이지만 저녁밥은 꼭 뭘 드시고 싶으냐고 물어보고 저녁밥을 지었다.
증조모께서는 저녁상을 물리신 후 우리에게 재미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새벽 일찍 일어나 집 안팎을 쓸고 닦는 볼 일을 다 보신 후 목침 베고 누우셔서 책을 읽으셨다.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달려오면 배고픈 우리의 심정을 잘 헤아려서 찬장에서 꼭 맛난 엿이라든지 고구마라든지 아껴두신 군것질거리를 안겨주셔서 우리를 기쁘게 만드셨다.
증조모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증조할머니를 진정 마음깊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때가 지금부터 40여년 전이었다. 그리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다. 피가 섞이지 않았을지라도 가부장적인 사회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서열대로 참 화목하게 잘 지냈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만의 특별한 풍경이 아니고 대부분의 가정이 대가족이었고 세대가 서로 공존하던 시대였고 어른의 말씀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데 대한 어려움 때문에, 솔직히 말하면 귀찮아서, 노인아파트로 입주하기를 권했다. “우리 서로 편한 대로 하자”고 마지못해 하시는 말씀임을 헤아릴 수 있지만 그 편리성을 이유로 노인아파트로 가시게 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부부 중심의 가정에서 어머님을 모셔 와 같이 사는 것은 익숙하지 않고, 어머니께서 미국에서는 절대 살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셨고, 둘째 아들이라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다는 구구절절의 핑계를 대보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찔리는 부분이 너무도 많아 떳떳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
슬하에 네 명의 자녀를 두신 어머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허망한 세월이고 일흔이 넘은 노년에 혼자서 사실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으셨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즈음은 핵가족 시대, 아니 저마다 혼자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외치는 그런 사회로 변해 버린 것이다. 주일날 교회에서 뵙고 예배마친 후 교회 가까이 위치한 노인아파트를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치 큰 적선이나 하는 듯한 심보이다.
처음 가져올 때는 한 송이만 덩그마니 핀 분홍빛 백일홍이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꽃송이도 제법 많아졌다. 예쁘게 잘 자라주는 백일홍을 볼 때마다 시대가 변하여 위엄을 잃게 된 어머님의 심정이 자꾸 헤아려진다. 그리고 나의 어릴 적 시대상과 비교해 보면서 나 자신의 무능력, 강퍅한 마음 등 복잡한 심정적인 갈등이 솟아나 그 예쁘고 추억어린 백일홍 꽃을 힐끗 쳐다볼 뿐 감히 앉아서 오래 감상할 수 없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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