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이었다. 새크라멘토로 가는 밤길은. 지난 5일 캘리포니아주 교육위원회에서는 2015년까지 각 학교에서 쓰게 될 교과서와 추천도서를 최종 승인하는 공청회가 있었다. ‘요코 이야기’를 반대하는 한인들의 뜻을 모아 밤 열두시 어바인을 출발한 버스는 세리토스와 LA를 거쳐 열두 명의 승객을 태우고 밤새 고속도로를 달렸다. 길고 긴 밤이었다.
이윽고 동녘 하늘이 훤해질 무렵, 일행은 비로소 함께 버스에 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마다 오늘 공청회에 참여하게 된 이유와 의미를 나눴다. 몇몇 학부모님들, 한국학교연합회, 여러 한인단체에서 오신 분들 중에는 여든 두 살의 할아버지도 계셨다. 또 황석영과 박완서의 소설을 번역하신 김준자 선생님도 함께 하셨는데 얼마 전에는 ‘요코 이야기’의 대안으로 ‘The Lost Mother’를 번역하셨다고 했다.
오전 10시, 드디어 새크라멘토 의사당이 보였다. 오늘 청문회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두들 사뭇 긴장된 표정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이곳까지 오게 된 일치된 힘을 보여주기로 했다. 우선 가주교육위원회 로비에 모여 미처 다 집계하지 못한 서명용지를 정리했는데 모두 1만9,5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오후 1시에 예정되었던 공청회가 2시 반으로 연기되자, 우리는 일찌감치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내 바로 앞에 앉은 작가 이혜리씨는 자신이 정리한 노트를 보며 연습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이템 11, 영어 읽기 교과과정과 교재에 관한 공청회 순서가 되었다. 맨 먼저 열두 명의 교육위원들 앞에서 전체 연설을 한 분은 장 변호사님이었다. 어릴 적 자신이 경험했던 창씨 개명, 그리고 창작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사실의 오류 등을 지적하며 추천 도서로서 균형감이 부족하다고 역설했다.
곧이어 학교에서 그 책을 읽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느꼈다는 딸의 체험을 들려준 한 학부모는 한국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간절한 뜻을 전했다.
마지막은 이혜리씨의 차례였다. 그는 부드럽고 유연한 자세로 최근 가파르게 성장해 가는 미주 한인사회를 소개하며 미래 지향적인 대안으로 ‘When My Name Was Keoko’ ‘Year of Impossible Days’ ‘Lost Names’ 등을 추천도서로 제안했다.
이제, 즉석에서 교육위원들의 찬반투표가 있을 차례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사안에 대해 두 명의 발언자가 더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정말 예상치 못한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들은 ‘요코 이야기’를 낸 두 출판사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도 ‘요코 이야기’가 추천도서 목록에서 제외되길 바란다는 게 아닌가. 마침내, 교육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15년간 중학교 추천도서로 읽혀왔던 ‘So Far from the Bamboo Grove’가 목록에서 제외되는 뜻 깊은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 새크라멘토로 가는 길에 권정생 선생님이 쓴 ‘슬픈 나막신’을 떠올렸다. ‘요코 이야기’만큼 드러매틱하지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도 않았지만 이 동화에는 동시대 또 다른 공간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권정생은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 가난한 도쿄의 뒷골목에서 자랐다. 자전적 이야기인 이 동화를 통해 그는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 속에서 가장 나약한 영혼들이 어떻게 상처 받으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들의 삶을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슬픈 나막신’은 일본에서도 번역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진정한 평화의 울림을 담고 있는 책, 이제 우리 앞엔 아이들에게 읽힐 좋은 책을 꾸준히 발굴하고 만들어 학교와 지역 도서관에 널리 알리고 보급할 일이 남아 있다.
이미경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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