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해밀턴. 백남준 등
다양한 장르 작가 작품 선봬
유럽작가보다 폭과 깊이 심오해
일본.인도.중국 영향 느낄 수 있어
24일 오전 아트 히스토리 강좌의 일환으로 구겐하임에 온 20여명의 알재단(대표 김숙녀) 회원들이 로비에 모여 있을 때 한 무리의 유치원생 단체 관객들이 우르르 뮤지엄에 들어섰다. 꼬마 관객들은 모두가 거의 뒤로 넘어질 만큼 고개를 한껏 들어 투명한 7층 높이의 천장과 나선형의 뮤지엄 내부를 바라본다. 대부분 중년 여성인 알재단 회원들은 감정에 솔직한 유치원생처럼 눈빛을 반짝이고 입을 벌리며 경탄하진 않지만 이들과 똑같은 설레임을 가지고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뮤지엄을 방문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특히 구겐하임처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건축물에 들어설 때는 비록 이전에 몇 번이나 와본 곳이라도 새삼 화사해지는 기분을 감추기 힘든 법이다. 게다가 모마와 메트와는 달리 구겐하임은 내부가 탁 트여, 로비에서부터 전시 작품들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표를 사기 전부터 기대감을 키워준다.
회원들이 이날 감상할 전시는 1월 30일부터 시작되어 4월19일까지 열리는 ‘제3의 정신전(The Third Mind: American Artists Contemplate Asia, 1860-1989)’이다. 아시안 예술과 문학, 철학이 미국의 예술계와 지성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주요 작품들이 뮤지엄 전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대형 기획전이다. 로비 한구석에는 얼음과 마이크로폰이 혼합된 컨셉츄얼 아티스트 폴 코스의 작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엄청난 분량의 책무더기가 쌓여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앤 해밀턴의 설치작 ‘휴먼 캐리지’의 일부다. 감상은 이미 로비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김지혜 강사의 안내로 투어는 휴먼 캐리지가 시작되는 5층에서부터 2층까지 내려오는 동선으로
진행됐다. 기획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인 앤 해밀턴의 작품은 의류, 종, 서적, 스트링 등 각종 오브제들이 와이어를 통해 로비까지 이어져있다. 앤 해밀턴은 언어, 건축, 물질 등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작품에 담아내왔던 작가다. 회원들이 잘게 찢어진 책들의 무더기를 유심히 감상하는 동안 김지혜 강사의 설명이 이어진다. “ 아마도 작가는 서양인이 동양의 정신을 완벽하게 번역(translation)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지 모릅니다.” 소설가이기도 한 어떤 회원은 다른 회원에게 “ 텍스트라는 것이 결국 무의미하다는 의미인 것 같아”라고 느낌을 전한다.
지난해 5월부터 기획전에 참여해 온 유일한 한인 인턴 큐레이터 최윤정씨에게 물었다. “ 휴먼캐리지는 이번 전시를 위한 프리미어 작품이기 때문에 평론가들마다 해석이 분분합니다. 다만 해밀턴이 천착해 온 작품 경향으로 봤을 때 번역, 텍스트라는 단어는 분명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겠죠.”
한 층을 내려오자 갖가지 사운드가 들린다. 선과 불교 등 동양적인 정서를 기본으로 한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 작품들이 보여지고 있다. 회원들이 이미 떠난 후지만 이날 오후 3시에는 플럭서스의 원년 멤버로 백남준 작가와도 가까웠던 앨리슨 노울스의 퍼포먼스가 이곳에서 벌어졌
다. 3월 28일에는 역시 플럭서스 무브먼트의 기운이 가득한 최정희의 멀티 비디오/사운드 작품 ‘Rice’의 전시와 퍼포먼스가 예정되어 있다.
3층부터는 순수 추상, 미니멀리즘, 컨셉츄얼 아트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전시되고 있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여백을 중시하는 동양 예술이 이런 장르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게 보인다. 유난히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눈에 띈다.
3층 전시관에서 반가운 이름을 만난다. 백남준씨의 비디오 아트 ‘필름을 위한 선(Zen for Film)’이다. 그 옆으로는 오노 요코의 소품들이 거의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다. 그가 존 레논의 아내로 유명해지기 이전 이미 대표적인 뉴욕의 일본인 전위 예술가였다는 사실, 비틀즈 멤버들이 한때 인도 음악에 심취했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조지 해리슨이 인도 현악기 시타로 연주하는 비틀즈의 곡이 갑자기 전시장을 메우고 있는 느낌이다.
잭슨 폴록을 비롯해 수묵화의 영향을 받은 유명 미국 작가들의 다양한 그림들이 길게 이어진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두고 색과 형태와 구도 등을 치열하게 발전시켜 온 서양의 화가들이 검정과 흰색만으로 이루어진 수묵화와 서예 작품의 간결함과 심오함을 보고 어떤 충격을 받았을 지 짐작이 가는 듯했다. 거꾸로 내려왔지만 2층은 실제로 전시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램프 입구에 그 유명한 센가이 기본의 수묵 페인팅 ‘원, 삼각형, 사각형’이 있다. ‘선(Zen)의 모나리자’라고 불릴 정도로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회원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아시안 문화가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 확인하고 의견을 교환했던 유익한 투어였다. 최윤정 인턴의 설명처럼 17세기 이후 유럽을 휩쓸었던 ‘자포니즘’이 장식적인 면에 한정되었다면 미국 화가와 문인들에게 미친 아시안 아트의 영향은 보다 폭과 깊이가 심오했다. 다만 감상을 마친 회원들 모두 느꼈던 아쉬움은 예상대로 중국, 일본, 인도 등에 비해 한국 문화의 존재감을 이번 전시에서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즐거운 뮤지엄 방문을 마친 뒤 80년대 유행하던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을 새삼 꺼내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그러나 전시의 제목에 나타난 1860년 이후의 시기란 모든 아시아 국가가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고통을 받기 시작한 근대의 고난기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거세된 이번 전시회를 본 후 서구의 작가들이 발견해낸 동양적인 아름다움은 실제로 당시 아시안들의 실생활과는 얼마나 연결되어 있었을까라는 물음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구겐하임 주소:1071 5th Ave, 89th st 문의:212-423-3500(목요일 휴무)
<박원영 기자> wy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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