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타향에서 비극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온 삶을 마감해야 하는 한인을 볼 때마다 괴롭기 짝이 없다. 누구는 자살해서는 안 되는 백 가지의 이유를 대기도 하고 또 죽을 용기가 있으면 살지 왜 죽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살아있는 우리가 더 잘났을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식을 두고 떠난 그 마음의 끝을 어찌 우리가 알겠는가.
사람은 돈이 없어지면 생각의 범위가 좁아진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1971년 여름 나는 동부의 한 대학원에서 유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영어는 굿모닝, 땡큐 정도밖에 몰랐다.
영어는 어렵고 장학금은 언제 나올지 모르고, 가족은 보고 싶고, 생활비랄 것도 없지만 줄이고 줄여도 돈은 없어지고... 그러다가 딱 1달러가 남았는데 어디 기댈 데라곤 없었으니 그 때의 그 어두움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며칠을 굶었을 것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이 왜 그리도 많은지.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얻은 일이 청소부였다. 그때 최저 임금이 1달러 60센트였다. 그것도 얼마나 감지덕지 하던지. 청소부 일은 고되었다. 나는 걸레질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이후 아내에겐 절대 걸레질을 시키지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주말에는 하역작업을 했는데 100파운드짜리 밀가루 포대가 그리 무거운 줄 처음 또 알았다. 한번은 트럭 기사가 내게 2달러 수고비를 준 적이 있었는데 그냥 덥석 받았다. 돈이 없으면 염치도 없어지는 줄도 그때 알았다. 그 이후 나는 식당엘 가도 팁만은 후하게 놓는다.
그때 가장 괴로웠던 일은 3살 먹은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저녁때면 “아빠 올 시간이라고 엄마에게 마중 나가자”고 조르던 아이였는데. 절망에 빠져 죽어나가는 한인들을 죽지 않게 하는 안전망 구축이 시급하다.
김륭웅/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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