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중년의 남자가 흰 지팡이를 들고 초등학교 4학년 교실 문을 들어선다.
그의 곁에는 손가락 점자 통역사가 있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이 그를 바라본다.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눈으로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손바닥에 써준다. …아마노, 유키, 카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알은 체를 하자, 그제야 학생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일본판 헬렌 켈러인 후쿠시마 교수의 이야기를 담은 NHK 방송, ‘당신의 인생을 말해주세요’라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9세 때 한쪽 눈이 실명하면서 시작된 그의 장애는 18세가 되었을 때, 전화벨 소리를 마지막으로 침묵과 어둠의 세계에 그를 던져놓았다. 그때 그는 우주에 혼자인 것 같은, 아니, 우주 밖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의 세계마저 잃어버린 자식의 고통을 누구보다 아파한 어머니는 우연히 그의 손가락을 두드려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손가락 점자’를 고안해 냈다. 마치 점자 타자기와 같은 원리였다. 그는 마법 같은 어머니의 ‘손가락 점자’를 통해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고, 일본 최초의 시청각장애인 교수가 되었다.
교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지는 동안, 곁에 있던 손가락 점자 통역사는 쉴 새 없이 그의 손가락을 두드려댔다.
-시청각장애인이 되고 난 뒤 가장 슬픈 일은 무엇인가요?
가족의 얼굴과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 기억이 멈춰버리는 것, 별을 볼 수 없고 음악을 그리워하게 된 것, 그러나 가장 슬픈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기분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만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은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어려운 장애를 극복하고 도쿄대 교수가 된 인간 승리 드라마의 주인공이어서가 아니라, 참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그 날 밤 아이들과 후쿠시마 교수의 대화를 보며, 빌 마틴 주니어와 존 아캠볼드가 쓴 한 편의 시 같은 그림 동화 ‘매듭을 묶으며’(Knots on a Counting Rope)가 떠올랐다.
태어나면서부터 시력을 잃은 나바호 인디언 소년, ‘푸른 말의 힘’은 깊은 밤 모닥불 가에서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태어난 날의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른다. 이제껏 수십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지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리고 그날 밤 어둠의 저편에서 달려온 커다랗고 푸른 말들이 연약한 아기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던 놀라운 순간과 ‘푸른 말의 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듣곤 기뻐한다.
사랑하는 할아버지로부터 어둠의 장막을 넘어, 눈이 아닌 마음의 힘으로 어둠을 꿰뚫어보는 법을 배웠던 시간들, 자신의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말달리기 경주를 완주해 낸 기억들은 소년에게 세상을 헤쳐 나갈 용기를 더해 주었다. 이 그림책 속엔 장애를 가진 소년의 고통이나 슬픔 대신 자신이 태어난 특별한 의미와 그를 둘러싼 자연과 사람들로부터 받은 힘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소년이 있다.
이미 수십 개의 매듭이 생긴 긴 끈을 들고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말한다.
“얘야…또 한 번 그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 이제 수세기 끈을 하나 더 묶어야겠다. 이 끈이 매듭으로 가득 차면, 이야기가 네 마음속에 새겨져 네 스스로 제 자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저는 더 굳세게 자라겠죠, 할아버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자기만의 이야기와 노래가 있다.
장애가 있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니까.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니까.
이미경/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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