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초여름, 캘리포니아의 결혼식은 너무나 아름답다. 이런저런 연결로 자주 참석하게 되는 결혼 피로연에서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라는 질문에 내가 벌써 올해로 ‘은혼식’을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요즘은 결혼 50주년 되는 금혼식, 60주년 회혼식을 하시는 분들도 많으니 은혼식 하면 어린애들 장난 같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25년이란 세월이 짧은 기간만은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미성숙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지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아찔한 생각까지도 든다.
20대 중반 결혼할 때만 해도 나는 나 자신이 상당히 성숙한줄 알았는데 막상 결혼을 해보니 골치 아픈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 중에서도 문제는 나와 아내가 서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선순위가 많이 다른 것이었다. 내가 중요시 하는 것을 아내가 똑같은 비중으로 생각지 않을 때는 화가 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구나” 하고 오해를 했었다. 세월이 지나 각각 개인마다 우선순위와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부 상담가인 게리 채프만 박사는 인간 누구나 고유의 언어나 모국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듯,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에도 독특한 언어가 있고 이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전달한다고 한다. 그는 사랑의 언어를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육체적인 접촉’의 5가지로 분류한다. 부부가 배우자의 제1의 사랑의 언어를 서로 알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의 제1의 사랑의 언어는 ‘함께하는 시간’이었고, 독립심이 강한편인 아내의 제1의 사랑의 언어는 가정 일에 대한 ‘봉사’ 였던 것 같다. 사랑의 언어를 전혀 모르던 결혼 초기에, 아내는 나에게 집안일이나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해결해 줄 ‘봉사’를 통해 사랑을 느끼길 원했었던 것 같다. 업무에 피곤했던 나는 ‘봉사’는 생각지도 않고 아내가 나와 함께 아늑하게 있어 주길 바랐었다.
가정과 직장에서 해결해야 될 일이 많았던 아내는 항상 나를 사려 깊지 못한 남자로 생각했었으니 내가 전혀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중국말을 하는 사람과 독일어를 하는 사람이 한 집에 살았다고나 할까.
나의 사랑은 파랑새가 되어 날아가 버린 느낌이었고, 나는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살다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그럭저럭 지나면서 언제 부터인지 아내가 원하는 것을 곧잘 해주었다. 그런 내가 사랑스러웠던지 아니면 늙어가는 내가 처량해 보였던지 요즘 아내는 나를 잘 따라주고 많이 사랑해 준다.
얼마 전에 이웃의 젊은 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은 결혼생활이 쉽지 않다고 우리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들은 몇 년 전 결혼한 맞벌이 부부인데 갓난아이를 키우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직장생활로 바쁜 여자는 남편에게 집안일 봉사를 원하는데 남편은 직장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쉬면서 부인하고 아늑하게 있기만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짜증만 나고 서로의 사랑이 식어지는 느낌이란다.
어쩌면 20여 년 전 우리 부부와 똑같은 모습인지! 나는 씩 웃으면서 사랑의 언어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것을 왜 모르느냐고 훈계까지 했다.
그랬더니 젊은 부인이 “선생님 내외 같이 처음부터 잘 맞는 부부는 참 좋겠어요” 한다.
내 얼굴이 아내보기가 미안해 화끈 거린다.
결혼의 세월이 지날수록 동감되는 좋은 말들이 있다.
“오래 지속되는 진정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선택이다” “사랑이란 당신이 누군가에게 행하는 것이지 당신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힘써 그의 사랑의 언어를 구사하도록 노력해야한다”
이렇게 좋은 말들이 왜 25년이 지난 이제야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걸까?
김홍식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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