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사건 후 “그가 정신과 의사를 찾았다면 자살을 피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나는 즉각 “물론 그랬을 것”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얼른 들으면 대단히 오만한 장담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종합병원에서 28년 정도 정신과를 맡아온 경험에서 나온 대답이다. 자살미수 환자를 수없이 보고, 자살 직전의 심정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환자들이 자살할 때의 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절망’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누구도 자기가 처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고 믿는 절망이다. 이 감정을 파헤치면 그것은 백계무책, 진퇴유곡, 막다른 골목, 절벽의 끝, 속수무책, 사면초가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는 ‘Hopeless and Helpless’ ‘End of the rope’ ‘Dead end street’ ‘Pit’ 등으로 표현한다. 즉 철저히 궁지에 빠진 상태라는 말이다.
그런 심정에 도달한 상황은 제각각이라 하더라도 자살 직전 마음의 상태는 매한가지다. 그 순간에는 그 길, 즉 자살밖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오랜 우울증, 갑작스런 재난, 사업 실패 등 이유야 많겠지만 마지막 순간 자살을 하기로 결단할 때의 마음상태는 같다.
이런 상태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지독한 외로움을 동반한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극심하게 우울한 상태에서는 시야가 좁아지고 심한 아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환자에게는 정말 해결책이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객관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면 그것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흔한 속담이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이럴 때를 얘기해주는 참으로 소중한 금언이다. 어려움이 닥치고 거기에다가 우울증까지 겹치면 시야가 좁아져서 문제의 해결책이 점점 더 멀어 보인다.
지도자의 경우는 특히 더 고독하다. “고독한 자리다(It’s lonely up here)”는 말들을 자주 하는데 이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고독과 더불어 살아야하는지를 말하는 솔직한 고백이다. 지도자에게는 늘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지만 그중에서 진실한 친구가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낸시 레이건 전 대통령 부인은 궁지에 몰렸다고 느끼면 곧 친구들을 백악관에 불러들였고 때로는 점술사까지 불러들였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까운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생명과도 같다. 클린턴 전 대통령도 궁지에 빠져 잠이 오지 않은 밤에는 친구를 불러 때로 밤을 새면서 얘기를 했다고 한다. 포드 전 대통령도 우울증에 쓰는 약을 오래 복용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돈 자랑 자식 자랑은 삼가고 병 자랑은 맘껏 하라”고 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수치와 체면이라는 것이 강해서 이런 것을 막는 것 같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응원군으로 청할 믿을만한 이웃이 있다면 불행한 사태를 피할 수가 있고, 설령 확실치 않더라도 겨자씨만큼이라도 해결책을 구하는 희망이 있다면 길은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만성 정신질환이 없는 한 자살미수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자살하려는 경우는 드물다.
노 전 대통령도 무척 고독했을 것으로 믿는다.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부끄러움 없이 다 털어놓고 기댈 수 있는 막역한 친구가 있었을까. 그랬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독은 참지 말아야 한다.
강창욱/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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