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재단 서머 아트 클래스 - (2) 피카소
기하학적 형태통해 추상의 길목 열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신동으로 92세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20세기 미술의 역사를 새로이 썼다.
프랑스 화가 조지 브라크와 함께 큐비즘(Cubism) 운동의 대표 화가로서, 피카소는 서양 회화를 지탱하는 개념이었던 공간성의 전복을 격자무늬(Grid) 혹은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추상으로의 길목을 열었다.
수백년 동안 서양 회화에서 원근법은 중요한 도식으로 존재해왔고, 화가들은 완벽한 원근감의 재현을 통해 그림을 사실과 가까운 형태로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이런 원근감의 무시를 마티스는 색채의 해방을 통해 이루었고, 피카소는 입방체나 격자무늬를 통해 이루었다.
1908년에서 1911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브라크와 피카소는 마치 화면이 조각조각 부서진 듯한 인상을 주는 회화들을 만들어냈는데,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1907·사진)에서도 여인들의 몸이나 커튼이 마치 유리가 깨져 조각난 듯 파편화된 형상을 볼 수 있고, 이 시기 피카소는 초상과 정물을 소재로 색채는 갈색이나 회색톤으로 절제한 채 공간성에 대한 탐구를 한다.
1912년 피카소는 타원형 캔버스의 테두리를 밧줄로 감고 그 위에 정물 그림과 함께 그 당시 노동자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등나무 의자 무늬의 식탁보를 오려 붙인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Chair Caning)이라는 최초의 꼴라주 작품을 내놓았다. 서양에서 ‘회화’라는 장르는 캔버스위에 물감을 사용해 붓으로 그리는 것이었는데, 피카소는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해 볼 수 없었던 도전을 사물을 꼴라주를 통해 하게 된 것이다.
꼴라주는 형식적으로 단순히 사물이나 신문 등을 캔버스에 붙인 것뿐만 아니라, 대중 매체나 저급 문화를 상징하는 사물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서양 회화가 누려오던 ‘고급 예술’ 로서의 지위 혹은 ‘엘리트주의’를 전복시켰다는 의미도 있다.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는가 하면, 스페인 내전 중 바스크 지역 도시 게르니카를 나치 비행기들이 폭격한 참상을 알리는 ‘게르니카(1937)’와 한국전쟁에 대한 그림 ‘한국에서의 대학살(1951)’을 통해 꾸준히 정치적인 주제를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회화라는 장르 파괴를 통해 피카소가 추구했던 것은 예술의 영역을 확대하고 재정의 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였다.
*강사 김지혜는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미술사 박사과정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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