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등상은 받아본 적이 없지만, 초중고 12년 동안 개근상은 놓치지 않았다. 순전히 우리 엄마의 극성 덕분에. 몸은 열이 펄~펄 S나는데도 엄마는 “아프단 낫지 않으리!” “학교 가면 나아서 온다~”며 교문에다 나를 밀어 넣으셨다. 하루종일 버티던 내가 방과 후 개선장군처럼 집 대문을 열면 “아프단 낫지 않으리!” 라던 엄마의 예언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근상 다음으로 많이 받은 상은 ‘그림 그리기 대회’ 상이었다. 봄가을에 학교 대표로 뽑힌 나는 각 대학교, 신문사, 어린이 단체 등의 연례행사인 ‘어린이 사생대회’에서 매번 입선부터 특선 상을 받았고, 중고등학교 시절까지도 그렇게 하였다. 나의 작품(?)은 대부분 수채화였다. 덧칠이 허용되지 않는 한 번의 붓질로, 색의 조화가 윤곽과 함께 백지 위에 드러나는 수채화의 그런 투명함을 좋아한 나는, 그림책도 보고 미술관과 박물관의 수없이 많은 전시회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미술선생님께서 “양희는 색감이 참 좋구나. 미대에 가면 좋겠다. 응용미술과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칭찬하시면서 방과 후 나를 미술실로 불러 ‘색의 대비’를 설명하시며 마치 날 미술학도처럼 대우하셨기에 미술시간이면 난 무슨 특권층인 양 우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아파서 엄마와 함께 친척 약국집에 들렀는데, 약과 돈 통을 오가며 흘러넘치는 종이돈을 꾸욱 꾹 눌러 담는 약사의 손에 나의 시선이 꽂혔다. 견물생심! 넘쳐 나는 돈을 보자 나는 통증도 싹~ 잊고, 어린 마음에 “약사가 되어야지!” 결심하였다. 미대에 가겠다던 마음은 약대로 바뀌어 고 2부터 이과 수학수업의 파도 속에 헉헉거리고 있었다. 일주일이면 하루 걸러 사흘씩 있는 수학시간. 그 딱딱한 숫자놀이의 거부반응으로 나와 친구들은 수업시간 땡땡이 칠 꾀를 내었다. 마침 우리 반에는 가수 혜은이와 똑~같이 노래하던 친구와 ‘동백아가씨’를 이미자처럼 부르던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또래들과 달리 ‘으악 으악’ 하며 가곡을 부르던 나도 가세하여, 수학시간은 ‘장기자랑’ 시간으로 돌변하였다.
혜은이와 이미자의 순서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으악으악 나와라” 하시면 나는 동요부터 가곡까지 서너곡을 불러 수학시간 ‘노래 한마당’을 마무리하였다. 미술선생님을 배반하고 돈 욕심에 약대를 지망한 나는 아이로니컬 하게도 이과 필수과목인 수학시간에 ‘성악 전공 지망생’으로서 무대 연습을 한 셈이다. 까맣게 잊었던 어린 시절 성악가의 꿈, 내 가슴에 있던 노래가 드디어 입술로 울려 퍼지게된 것이었다.
음대로 다시 마음을 굳힌 고 3때, 담임선생님은 나를 불러 매주 토요일 방과 후 친구들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노래도 가르치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 일로 나는 ‘가르치는’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내가 학생들에게 레슨과 강의를 할 때 ‘명강사’라는 인식을 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선생님의 특별대우 속에 미대생이 되려던 나는, 흘러들어 오는 돈을 보고 잠시 약사꿈은 꾸었지만, 수학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있던 음악가가 되었다. 결국 노래는 무대에서 내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수채화였고, 음악은 깊이 연구할수록 미술선생님이 말씀하시던 그 ‘색의 대비’가 고스란히 살아 움직이는 ‘응용미술’이 아닌가! 그 선생님들 한 분의 가르침도 허비되지 않고 나의 삶이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라디오서울 ‘김양희의 이브닝 클래식’ 진행.
sopyhk@gmail.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