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시간 운전 끝에 위스콘신 주로 이사하신 시부모님의 새 집을 처음 방문한다. 미시간 집 보다 훨씬 작은 집에서의 단출한 살림살이가 참 신선해 보인다. 전의 집 찬장엔 없어도 될 것들이 꽉 차 있었는데 이곳 찬장은 있어야 할 것조차 없어 많이 비어 있다. 식기와 용구가 거의 새 것이라 마치 신혼살림 같다.
이사하시던 마지막 주말, 짐 싸는 걸 도와 드리기 위해 남편과 난 새벽부터 5시간을 운전하여 올라갔다. 그 전에 두 분은 도심지에 살다가 시골이 좋다며 나무 우거진 외곽지대의 미시간 집으로 이사하셨었다. 아스팔트를 깔지 않기 위해 동네사람들과 함께 매년 관리비까지 내며 집 앞 흙길을 지키셨다. 덕분에 우린 흙길 옆 나무가 울창하고 잔디가 파랗게 깔린 집 마당에서 결혼 피로연을 하는 로맨틱한 기억을 갖게 되었다.
아이가 제 평생 스무 해 동안 ‘미국 할아버지, 할머니 집’이라고 부르던 곳. 우리 가족이 일 년에 대여섯 번씩 길고 짧게 머물면서 나무 등걸에 걸린 그네도 타고, 발 펌프질 배도 타고, 낚시질도 했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니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그러나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그 감상들은 순식간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틀 후면 이사 할 집의 물건들이 짐 싼 흔적 없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것이었다. 우리 더러 이틀 동안 이삿짐을 다 싸란 것인가, 하는 생각에 화가 나는데 집 한 구석에서 짐 담은 상자 수십 개를 발견했다. 아직도 쌀 게 이렇게 많은데 도대체 저 상자 속엔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병적일 정도로 준비성이 강한 시어머님은 이사 준비를 하는 2년 동안 두 아들에게 가족력이 있는 가구와 물건들을 물려주셨다. 그런데도 아직 꾸려야 할 짐이 그렇게 많은 것은, 무남독녀여서 부모로부터는 물론 자식 없던 이모로부터도 고가구와 물건들을 물려받은 때문인 것 같았다.
같은 집에서 그것도 큰 방과 창고가 딸린 집에서 20년 이상 살면서 버리기보다 사재기를 하셨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훨씬 작은 집으로 옮기게 되자, 살림 규모를 얼마만큼 줄여야 하는지 감을 못 잡으셨던 듯도 싶었다. 무엇이든 필요하지 않은 건 두고 가도 좋다는 새 집주인의 말에 짐을 싸다가 못 싸면 불필요한 것들은 두고 가면 되겠지 하셨던 것도 같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천둥번개가 치고 정전이 되었다. 대낮인데도 너무 어두워 촛불과 램프를 켜놓고 짐을 쌌다. 다음날에도 전기가 안 들어와 영 속도가 붙지 않았다. 오후엔 친척들이 여는 환송회에 가는 바람에 서너 시간 손을 놓아야 했다. 저녁이 되어서 전기가 들어왔지만 우린 다음날 출근해야 해서 서둘러 나왔다. 내일 아침 일찍 이사 트럭이 온다는데 쌀 물건은 아직도 잔뜩이니 어쩌실 건가?
이사 트럭이 왔을 땐 더 이상 빈 상자가 없었단다. 상자에 넣지 않은 물건은 못 싣는다 하여 승용차에 실으려 했지만 개도 태워야 해서 얼마 싣지 못하셨단다. 그래서 부엌용품은 포크 하나도 못 갖고 오셨단다.
덩치가 너무 커서 처음부터 포기한 물건도 많았다. 시아버님의 남다른 수집품들. 연병장 탱크 대열을 연상케 했던 뒷마당의 7~8개 잔디 깎는 기계와 지하방 구석마다의 6~7개 옛 오르간과 악기들을 다시 보지 않아도 되니 시어머님은 속으로 얼마나 시원해 하실까.
새 집 지하방에 가니 책 사랑이 남다른 분들의 책이 자리를 찾지 못해 아직 높게 쌓인 상자 20여개 안에 있다. 우리가 쓰는 방엔 남편과 아들이 어릴 때 학교에서 만든 도자기 등이 장식되어 있다. 화장실엔 한국방문 때 묵었던 호텔의 이니셜이 새긴 슬리퍼가 있는 게 아닌가? 아하, 따뜻한 추억이 새겨진 이런 것들을 먼저 챙겨 넣으신 거구나.
은퇴생활엔 필요한 물건들보다 추억이 깊이 새겨진 물건들이 생필품이 되어야 할 것도 같다. 두 분의 은퇴생활이 언제나 푸근하길 빈다.
김보경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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