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늘 높이 새하얀 물체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은빛 광채가 번쩍하는 듯 하여 똑똑히 쳐다보니 비행기 모양이었다. 일본 동경을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저 B-29라는 무서운 폭격기를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1학기가 끝나려면 아직 여러 날 남았는데 학생들이 웅성웅성하니 김활란 박사는 서둘러 여름방학을 선포하게 된다.
1945년 7월 하순, 정확한 날짜는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날 신촌에서 경성역까지 걸어서 청진행 기차를 탔다. 불과 보름도 못 되어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고 청진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 내려오게 될 줄을 그땐 아무도 몰랐었지…
꼬박 22시간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고향 역에 내린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집으로 달려갔다. 넉달 만에 예고 없이 나타난 딸을 쳐다보며 반갑다는 말도 없이 어머니는 “서울이 더 안전할 텐데…”하셨다. 공업도시 청진은 이미 생지옥으로 변해있었으니 그날 밤부터 나는 그 말씀의 뜻을 실감하게 된다.
“B-29기 00대가 시마네 껭을 통과 청진을 향해 북진 중이다.” 나는 어머니가 하시는 대로 반공모(솜을 두툼하게 둔 어깨까지 가려지는 모자)와 그 위에 철모를 쓰고 구급가방을 둘러메고 방공호로 냅다 뛰었다.
그러다 히로시마에 신형폭탄이 떨어져 피해를 보았다는 간단한 보도를 들은 후 그 지긋지긋하던 B-29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는 살았구나 싶었을 때 까만 비행기가 날아와 기총소사를 하고 바다 쪽에서 대포소리가 들려왔다.
“소련군이 상륙을 하니 산 쪽으로 피하라”고 라디오가 다급하게 소리치더니 방송국이 당했는지 뚜루룩…하고 끊겼다. 내가 들은 마지막 일본어 방송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방공호로 뛰어 들어갔다. 큰 길에는 군화소리가 요란하고 드르륵 드르륵 군 장비를 옮기는 소리, 명령하고 아우성치고 한참 지나니 조용해졌다. 일본군은 후퇴한 걸까?
잠시 후 휙! 하고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어둑어둑해진 밖을 조심조심 내다보니 바로 5미터쯤 떨어진 곳에 키가 장대 같은 남자가 저쪽을 보고 서있었다. 일본 군복이 아니었다.
소련 군인이구나! 이걸 어쩐다지? 캄캄해지는 것을 기다려 모녀는 단거리선수와도 같이 뛰어 집으로 들어가 지하실에 숨었다. 뭘 끓여 먹으려 해도 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숫가루만 타먹으며 며칠을 견디었다. 독안에 든 쥐 신세인데 어떻게든 벗어나야지…
가만히 보니 양쪽에서 서로 대포를 쏘고는 소총소리가 요란한데 얼마 후에는 쉬고 있었다. 그러다 다른 쪽에서 쾅쾅 대포를 쏘고 거기에 화답하듯이 쾅하고 대포를 쏘며 콩 볶듯이 소총을 쏴대고…
내 머리에 “나가보자”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쉬는 틈새를 잘 살펴가며 재빨리 행동하면 될 것 같고, 막연히 앉아있다 어찌 될지 모르니 어머니도 동의하셨다. 시가전이 벌어진 한복판 건물 벽에 붙어 조심조심 걷는데 강아지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모녀는 걷고 또 걸었다.
도중에 말을 타고 가는 일본인 도지사를 만났다. 인사를 했더니 “이 길을 계속 가면 연사인데 남행열차가 있을 테니 타고 가라”고 했다. 수행원도 없이 후루가와 지사는 그렇게 함경북도를 떠나고 있었다. 1945년 8월15일에… 라디오를 못 들은 내가 그 날의 의미를 어찌 알 수가 있었으랴. 나는 그렇게 광복을 맞았다.
김순련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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