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선생은 구 한말 나라가 위태로웠던 시기에 태어나 3.1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등 일제 강점기동안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우셨던 분이다. 그러면서도 한용운 선생은 결코 투쟁적인 민족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불교 사상의 자유와 평등, 평화와 생명, 그리고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는데 앞장섰던 선각자이셨다.
이런 한용운 선생의 평화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만해 평화상’이 올해로 13번째를 맞고 있는데 올해 수상자는 이란 최초의 여성판사를 지낸 인권 운동가인 시린 에버디에게 돌아 갔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2003년 제7회 ‘만해 평화상’을 받은바 있다.
만해가 일제 식민체제에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을 주장한 것과 김대중 대통령이 독재와 맞서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일은 그의 정치 역정이 투쟁과 저항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만해와 같이 모든 차별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 가치, 이를테면 사랑과 평등과 평화를 지향해 나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처럼 억울한 일로 가슴에 한이 맺혀 있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분이 가슴을 열어 세상을 포용하고 자신을 박해했던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생에 다섯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공산당한테 한번, 박정희 대통령한테 세번, 전두환 시대에 한번이었는데 감옥에서 지낸 햇수는 모두 6년, 망명과 연금생활이 10년, 그래서 도합 16년은 인생이 중단된 기간이라고 했었다.
평생동안 이런 어려운 고비를 겪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화해와 용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화해와 용서에는 구별이 있는 것으로 화해하는 것이 최고로 바람직하지만 설사 가해자가 사과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용서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지난 8월 13일은 마침 지난 1973년 김대중 대통령이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납치된 뒤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날로 김대중 대통령으로서는 생일처럼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날도 김대중 대통령은 중환자실에서 한달이 넘게 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82년 12월 23일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오게된다. 그때로부터 1985년 2월 8일 귀국할때까지 미국에서의 망명생활 동안 ‘한국 인권문제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정가에 한국의 인권탄압상을 알리며 동포들과 함께 줄기차게 민주화운동을 펴 나간다. 그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특별히 미국의 동포들과 인연이 많고 이민사회를 누구보다 많이 이해하고 걱정해주신 분이였기에 우리들이 그분에 대해 더욱 애정과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가 다시 뜨거워지고 있는 8월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씨앗을 뿌린 한반도의 평화를 마무리 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분의 조언과 역할이 필요한 싯점이고 그래서 몇년만 더 살아 계셨으면 하는 국내외 동포들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던 것인데 김대중 대통령은 떠나셨다.
그 사이 이념과 생각을 달리했던 많은 분들이 병실로 찾아와 쾌유를 빌며 다녀갔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떠나가셨지만 그분이 남기신 용서와 화해와 평 화의 정신은 오래 오래 땅위에 남을 것이다.
김용현 / 한민족 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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