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댕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 나는 우리 집의 식사를 끝낸 후의 식탁, 걷어 올려진 식탁보의 한쪽 끝, 굴 껍데기에 기대어 있는 나이프… 같은 정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한 번도 깨닫지 못 했다네” 20세기 현대소설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마르셸 푸르스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젊은 날 샤르댕의 그림을 마주한 체험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미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런 곳에서 미를 찾아보려고 하였다는 그의 고백을 나 역시 깊이 공감하는 것은 샤르댕의 그림들을 통해 사소한 사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일상의 나날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따뜻한 시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1699년 가구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화가 시메옹 샤르댕이 활약하던 당시의 프랑스는 역사화를 가장 고귀한 회화 장르라 생각하여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순으로 자리매김한 후 평범한 사물을 묘사한 정물화를 천대했으니 식기, 과일, 악기, 책 등 사실적인 소재들을 그려낸 그는 소재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당시 미술을 주도하던 아카데미 취향과 많이 달랐다. 플랑드르에서 유행하던 정물화를 능가하는 섬세함과 프랑스 미술의 세련미를 두루 갖춘 그의 작품들은 하찮은 사물들과 그 주변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부엌 살림도구들도 역사화나 인물화처럼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는데 무엇보다 내가 샤르댕에게 감동하는 것은 모든 사물을 미를 간직하고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의 사물에 대한 외경심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아름다운을 경험하려고 뮤지엄을 찾고, 음악회를 가고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 꾸지만 우리 곁에 있으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물들, 그것이 그릇이든, 과일이든, 시들어버린 꽃이든, 모든 사물은 미의 평등함을 지니고 있음을 잊은 채 아름다움을 일상이 아닌 특별한 공간 속에서 찾으려 한다.
예술의 감상이라는 것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단지 객관적 대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통해 교감하고, 인습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확장된 상상력을 갖고 사물을 깊이 응시하는 총체적 행위일 터이니 눈을 돌려 우리 곁에 무심히 놓인 흐트러진 식탁, 빛에 반짝이는 반쯤 비운 포도주잔, 비스듬히 놓인 쿠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벽처럼 늘 우리 주위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진심으로 바라본다면 하찮게 여긴 사물들이 조용한 명상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해방된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니 그것이 사물에 대한 참된 인상이며 미의 발견이다.
마른 멸치의 빈 내장은 물을 치는 자세 부드러운 몸짓/ 그리고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바다 냄새를 슬픔처럼 담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난류수역을 회유하던 멸치 떼가 물장구를 치면서/ 살아 있는 물결처럼 산란을 위하여 밤의 내만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달빛 같은 신비를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응고한 육질을 최후까지 떠받치고 있는 미세한 갈비뼈는 애처롭게 아름답다/ 꿈처럼 쓸쓸한 좌절의 역사를 내장하고 있는 마른 멸치/ 마른 멸치의 여린 뼈대를 보면 가을바다 물빛처럼 슬퍼진다
(허만하의 시 ‘마른 멸치를 위한 에스키스’ 중에서)
시메옹 샤르댕의 ‘물잔과 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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