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하늘은 높아지고 점점 푸르게 짙어져 가고 있었다. 바람은 제법 찬 기운을 머금었다. 기다리던 가을의 단비가 내렸다. 먼 곳 고향 마을에는 기러기를 비롯한 철새들이 비를 뚫고 하늘 높이 무리지어 날아 남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일손을 멈추고 가라앉은 심정을 기록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일기장을 넘기다보니 올해의 남은 날이 적다는 아쉬움이 든다. 지난날 무슨 일들이 있었나 첫 장부터 살펴본다.
메모의 대부분은 나의 기도이다. 미풍만 불어도 곧 천둥과 태풍이 불어 닥칠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런 불안을 없애려고 기도를 적는다. 겁쟁이고 어리벙벙한 사람이 세 아이의 엄마이다 보니 기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겁쟁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담배를 피워본 적도 술을 마신 적도, 하여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는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도 인생이란 것이 때로는 괴물처럼 느껴지고 당찬 도전이 필요한,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혼자 힘으로 인생과 씨름한다고 생각하면 턱없이 버거울 것이리라. 크리스천이라 혼자는 아니다.
살면서 행복한 순간이 훨씬 많았다. 그것은 인생의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다. 삶은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순간으로 마무리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욕심이다.
귀퉁이가 빨간 숫자로 기입된 날, 일요일의 페이지는 한 주도 빠짐없이 목사님의 설교를 메모해 두었다. 예배 시 찬양대의 찬양 시간에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적는다. 예배자로서 부족한 것이 많은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나를 지혜롭게 하시기를, 나를 고쳐 주시기를 빈다. 그래서 한순간만이라도 품위 있는 인간으로 살아보고 가고 싶다는 염원을 적는다.
책만 실컷 보면 좋은 나의 삶에 특별히 뒤돌아 볼만한 일은 없었다. 두드러진 일 중 하나는 3월에 충동구매로 반지를 하나 산 일이었다. 미혼 때 결혼반지 맞춘 일 말고는 보석상에 가본 적이 여태 없었다. 세월이 가니 얼굴에 주름이 늘고 옷도 일하기에 편한 것만 입으니 외양이 점점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즈음, 아주 간단하게 보석반지 하나를 끼면 젊은 날 베짱이처럼 놀기만 한 빈털터리로 보이지는 않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단골손님이 끼던 반지를 판다는 말에 진위여부도 모르고 덥석 샀다. 저녁과 깊은 밤의 경계선에 있는 색, 제일 좋아하는 색인 감청색, 블루 사파이어 반지였다. 한달 동안 어색함을 눌러가며 기분 좋게 끼었다.
비싼 반지를 끼고 있으니 아무래도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반지가 눈에 확 들어오니 사람들이 약간 주목하는 듯 거북했다. 아무에게도 눈에 뜨이지 않는 무색의 존재이고 싶은 평소 의도에 반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 타인이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과 외모가 나를 편하게 해준다. 반지 귀고리 목걸이 등 귀금속은 거추장스럽다. 솔직히 말하면 비싼 옷으로, 장신구로 남을 기죽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도 있다. 결국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값비싼 보석은 없어도 내가 가진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는 환상에 휩싸여 산다. 마음만 가지고 취할 수 있는 유형무형의 자산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 훈훈한 인간관계, 지혜, 안목, 하늘, 나무, 책, 공원의 벤치 등…
일기장을 덮으며 2009년의 남은 날들은 분주한 마음의 고삐를 꼭 잡고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보내자고 다짐한다. 가을의 아름다움, 떨어지는 색색의 낙엽을 보면서 이별과 소멸의 순간을 깊이 묵상하려 한다.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진심으로 깨닫고 불평 없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살아있되 죽은 자처럼 사는 것이 아닌, 진정한 산 자로서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 이것은 단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은가.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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