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바하에서 의료봉사를 마친 저녁 무렵 우리 일행은 풍광 좋은 외딴 바닷가를 찾아갔다.
안토니오라는 멕시코 원주민이 자신이 기거하는 작은 오두막집 옆에 돌담을 쌓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캠프장을 만들어 놓은 후 낚시하러 오는 한인들에게 빌려주는 곳이었다. 20여 년 동안 안토니오는 그 사용료를 받아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었다.
열댓명의 우리 봉사대원들은 붉게 타오르는 캠프파이어 주위에 둘러앉아 별빛이 찬란한 하늘과 밀려드는 파도소리, 꿀 같은 휴식에 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랫동안 말상대도 없이 외딴 곳에 살며 사람이 그리웠던지 안토니오도 우리와 어울렸다. 마침 일행 중 스패니쉬가 유창한 젊은 여성 애니 곁에 자리 잡고 쉴 새 없이 말을 건네는 안토니오에게 애니가 물었다.
“그동안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어땠어요?”
안토니오의 음성은 갑자기 톤이 높아졌다. 취기도 좀 섞인 탓인지 목이 메인채 울먹이며 대답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너무 너무 무시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가슴 속에서 얼음덩어리가 쨍하고 깨어지면서 그 편린이 가슴 속을 마구 찌르는 듯 했다. 아니 이 착한 사람이 마음속에 이런 상처를 가진 채 우리를 20년간이나 대하고 살았구나, 언제나 우리를 환대해주고 90도 절을 해가며 굽신굽신 모든 심부름을 웃으며 다 해주던 그 사람이 이사람 맞나, 싶기도 했다.
그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처받는 타인의 아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구나, 나 자신을 반성하며 많은 생각을 했었다.
샌쾌틴에선 하노라는 멕시코 여성을 알게 되었다. 그곳엔 주민들을 돕기위해 가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봉사하는 성실한 한인 한분이 있었는데 하노는 그 가게 점원이었다. 환자로, 점원으로 하노와 친해진 우리는 종종 하노의 집에 들러 라면을 끓여 먹고 행선지로 떠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하노가 털어놓는 이야기가 또 나를 찔렀다. “가게에서 일한지 10년이 넘었는데 우리 주인은 한번도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한 적이 없어요. 여러분은 항상 나와 함께 먹자고 해서 정말 좋아요”
“음식을 나누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깊이 새겨 우리가 하노와 식사를 같이 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저 장소를 사용하는 데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이었는데 그녀에겐 따뜻하게 전해졌던 모양이다.
안토니오도, 하노도 교육과 교양으로 다듬어진 사람들이 아닌, 말하자면 포장되지 않은 자연인들이다.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척도는 도덕적인 인간성이다. 그것으로 상대방을 평가한다.공정한 시선으로 친절하고 성의있게 대하면 그 마음속에 깃든 내면의 품위를 알아보고 허리를 굽히며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내면의 품위를 발견하지 못하면 비록 겉으로는 저자세를 취한다 해도 속으로는 외면하며 경멸한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지만 이들과 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일을 진행시키려면 권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심담은 친절과 질서를 유지하는 권위를 자연스럽게 융화시켜야 한다.
바하힐링미션엔 8~9년 동안 함께 일 해온 3명의 젊은 멕시코 원주민이 있다. 충실한 조력자들이다. 지난 추수감사절 때, 그들 및 그들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우리가 준비해간 음식을 차린 테이블에서 그들은 스패니쉬로 감사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난 후 나는 이렇게 말했다 - “너희들과 나, 우린 형제다. 그렇지만 내가 형이다”
최청원 / 내과의사, 바하힐링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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