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옥(MoMA 근무)
고등학교시절 어느 날,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장래 배필의 조건이 반짝 떠올랐다. 그 조건은 반드시 12월 마지막날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은은한 멜로디에 맞춰 잠자리 날개 같은 긴 드레스를 입은 나와 월츠를 출 수 있는 멋진 남자 라야만 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이 곡은 안익태 선생의 작곡이 나올 때까지 우리 애국가에 붙여졌던 멜로디이기도 하다. 내가 이 곡을 사랑하게 된 동기는 평범하다. 친구들이랑 함께 본 ‘애수(본명: Waterloo Bridge)’라는 1차 대전 영화에서의 애틋한 장면. 전쟁터로 나가야 하는 로버트 테일러와 발레리나였던 연인 비비안 리가 나이트클럽에서 그 날의 마지막 곡인 올드 랭 사인에 맞추어 월츠를 추고 있다.
밤이 깊어지자 한 사람, 두 사람 오케스트라 인원들이 퇴장하고 촛불도 하나, 둘 꺼져가고 드디어 가느다란 멜로디 역시 모두 멈추었을 때 이 두 연인은 어둠의 적막 속에서 조용히 키스를 하고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였다. 올드 랭 사인은 본래 스코트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가 1799년에 쓴 구절인데 이를 그 나라 전통 민요가락에 삽입하여 주로 새해를 맞이하는 바로 그 순간 이 곡을 울림으로써 더 유명해진 유래를 갖고 있다.
며칠전 낡고 낡은 내 수첩 속에 깨알처럼 적어놓은 이 시인의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 오랜 우정을 잊어야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올드 랭 사인의 의미는 간단히 ‘그리운 옛날’ 또는 ‘흘러간 세월’을 되새기며 우리의 우정을 늘 애틋하게 기억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Should auld acquaintance be forgot and never brought to mind?”
대학교 때는 이 시를 줄줄이 외며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던 생각이 감미로운데 얼마전 스코트랜드 한 대학의 교수진과 전교생이 41개의 언어로 동시에 올드 랭 사인 합창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나 멋졌을까?
이제 2009년은 곧 그리운 옛날이 되겠지. 12월 31일밤 열두시 정각에는 흘러간 세월을 뒤돌아 보면서 많은 감사를 드리며 내년 12월까지는 로버트 테일러와는 거리가 먼 우리 남편과 꼭 월츠를 배워야겠다는 다짐의 축배를 들련다. 내 상상의 잠자리 날개옷을 이따금 걸쳐보며 이 아름다운 월츠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내년의 올드 랭 사인 계절은 틀림없이 내 가슴속 깊숙이 들어와 앉을 거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