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탈 없는 한해의 마무리를 코앞에 두었던 그 날 밤, 나는 느긋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한 친구가 보내 온 이메일을 열고 있었다. ‘아름다운 섬 순례’ 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메일이었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섬 사진이 한 장씩 뜬다고 했다.
클릭을 하자 과연 섬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야자수와 황혼을 배경으로 모래사장이 여인의 나신처럼 S자로 멋지게 펼쳐진 섬 사진이었다. 홀랑 벗고 황혼 깃든 어스름 밤 바다 속에 뛰어 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나는 잠시 사진 속에 빨려 들어갔다.
내가 다음 사진을 위해 마우스를 클릭한 것은 집사람이 열려 있던 방으로 발을 막 들여놓던 순간이었다.
“도대체 뭘 하기에 아래층에서 그렇게 목 터지게 불러도 인기척도 없지?”
“응, 섬 사진…”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새 사진이 한 장 튀어나왔다.
“섬 사진? 저렇게 잘 빠진 섬도 있네!” 이미 내 옆에 다가와 컴퓨터 스크린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집사람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흘렀다.
“어어?” 해변을 배경으로 홀딱 벗은 금발미녀가 팔등신의 몸매를 뽐내며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수업 중 못된 장난치다 교사에게 들킨 학생처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현행범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나는 마우스의 좌우 버튼을 정신없이 눌러댔다. 온 몸에서 진땀이 삐져나왔다. 그러나 금발은 조금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나를 보고 계속 생글댄다. 집사람은 당황하는 내 모습과 홀딱 벗은 금발을 함께 지켜보기가 민망스러웠던지 한마디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왜 매일 컴퓨터 앞에 밤늦도록 붙어 있나 했더니….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네!
자식이 제 엄마한테서나 들어 마땅할 꾸중(?)을 듣고 나니 졸지에 내가 파렴치 가장으로 추락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가장으로서 쌓아놓은 그 알량한 권위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 느낌이어서 세모의 기분이 여간 떨떠름한 게 아니었다.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울컥 치밀었다. 섬 사진 사이사이에 누드가 끼어 있을 줄이야…. 그러나 집사람에게 궁색한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굳게 침묵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법에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했다. 법이 능히 나의 억울함을 대변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재판관 앞에 나섰다. 원고인 나는 당당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재판관: 과거 경험에 비추어 이런 결과를 초래하리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까?
원고: …….
재판관: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됐소? 도대체 뭣이 억울하다는 거요? 집 사람한테 들킨 게 억울한 거요?
원고: 받은 이메일 열어 보는 게 무슨 잘못입니까?
재판관: 누가 잘못이라고 했소? 억울한 일을 또 당하지 않으려면 다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이메일 발신자에게 ‘보암직한’ 내용은 사절한다고 점잖게 통고 하거나, 그럴 자신이 없으면 수상한 이메일은 열지 말고 아예 지워버리시오. 과속을 상습적으로 하는 운전자가 딱지를 떼이게 마련이요.
원고: 예술과 외설의 한계가 모호하지 않습니까? ‘보암직한’ 예술도 있지 않습니까?
재판관: 이번 케이스처럼 혼자 보다 누가 오면 후닥닥 가리고 싶은 건 외설, 떳떳이 같이 볼 수 있는 건 예술이오. 몰라서 묻소?
원고: 재판관님! 원고를 피고로 착각하신 게 아닙니까? 어찌 저를 피고처럼 다루십니까?
재판관: 원고의 억울함을 풀어줄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요. 원고의 행위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행위로 인정되어 오히려 유죄가 성립되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리라는 예측이 가능함을 인지하고도 그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건 유죄로 처벌 대상이오. 재범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집행유예 6개월을 선고하겠소. 당해 싸지, 싸!
“원고에게 집행유예가 웬 말입니까? 억울합니다!”
나는 재판관에게 목젖이 빠져라 악악대며 항의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억울함이 어둠과 함께 사라지고 어느새 새벽이 창가에 다가와 있었다.
황시엽 /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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