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박사 탄신 135주년인 26일을 맞아 그의 건국 위업을 되새겨 본다. 이승만 박사의 반공 사상과 혜안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탄생하지 못했다. 상해임시정부 시절부터 스탈린의 한반도 적화 정략으로 김일성과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 운동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해방당시 100여개가 넘는 각종 좌익단체들이 남한 일대에서 데모, 사보타지 방화, 파업 등 미군 군정통치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러한 와중에 이승만 대통령은 좌우정당에서 추대하는 지도자였으나 그의 반공사상과 자유경제 이념을 따르는 단체는 미약한 상태였다. 당시 문맹이 60%에 가까운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당의 정체를 몰랐다.
이승만 박사는 좌익 세력과 고군분투하였다. UN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남한만의 국민투표를 승인을 받았고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국민투표 일정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남북 평화통일 협상에 회유된 김구선생과 김규식 등 일행은 투표 한 달 전에 38선을 넘어 4자 회담 참석차 평양에 갔다. 남한에 돌아오자 즉각 대한민국 건국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남북평화통일을 주창했다. 만일 이들 주장대로 남북통일이 되었더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김일성 독재체재 하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자유 민주주의 나라가 된 것은 이승만 박사의 위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상모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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