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갑을 도난당해 신분증을 비롯해 크레딧 카드, 개인수표 등이 모두 분실되어 꼼짝없이 무면허 운전자로 며칠을 보낸 경험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일어난 일이라 차량등록국이 문을 닫아 바로 해결할 수가 없었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운전을 안 하고는 아이들 스케줄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무면허 운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운전면허증 번호만 기억하고 있으면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었지만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무런 교통위반도 하지 않았건만 지나가는 경찰차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것이 꼭 뭔가 나쁜 일을 하고 들킬까 봐 조바심 내는 기분이었다.
혹시 경찰이 불러 세우기라도 하면 아이들 앞에서 엄마가 무슨 범죄를 저지른 양 비춰지지는 않을까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을 겪게 되지는 않을까 별의별 걱정이 다 되었다. 단 며칠이었지만 모든 생활이 위축되고 불안한 마음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안하게 운전을 하면서 1,200만명의 서류미비자들이 떠올랐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운전면허증 하나가 생존을 위한 모든 기본 권리를 좌지우지하는구나! 그 분들도 학교에 보내야 할 아이들이 있고, 생존을 위해서는 일을 가야 하고, 아플 땐 병원도 가야 할 텐데 도대체 이렇게 불안한 생활을 어떻게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애리조나가 생각났다. 생김새만으로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할 수 있고, 적절한 신분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구금되어 추방까지 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법안 SB1070. 길거리를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권리마저 포기하라는 사상 최악의 반이민 법안 SB1070.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라고 하면서도 이민자들이 이뤄놓은 미국을 부정하고 모든 이민자들을 그늘 속으로 가두려는 법안 SB1070.
이 법안은 지난 3월21일 워싱턴 DC.에서 25만명이 결집하여 한 목소리로 외친 이민 개혁에 합리적인 방법으로 화합을 통해 해법을 찾도록 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신과 차별을 조장하며 찬물을 끼얹었다. 또 아시안 아메리칸 문화유산의 달 5월을 온통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어 우리로 하여금 자부심과 긍지 대신 근심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 미국 전역에서는 애리조나의 반이민 법안 통과에 반대하고 이민 개혁을 촉구하는 목소리로 들끓고 있다. 해결책은 하나이다. 포괄적 이민개혁 없이는 각 지역에서의 반이민 정책들을 막을 수 없고, 이민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미국의 미래를 위해서도, 정의로운 미국사회를 위해서도 포괄적 이민 개혁은 반드시 올해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조금 씩 조금 씩 우리 기본 권리를 빼앗기면서 이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가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탤 것인가. 선택은 분명하다고 본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당당하게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움직여야 한다.
오는 5월 29일, 메모리얼 데이 연휴를 맞아 전국에서는 ‘SB1070 반대 전국 행동의 날’을 가져 다시 한 번 포괄적 이민개혁을 외치게 될 것이다. 민족학교에서도 풍물패를 비롯해 수십명의 참가단을 구성하여 애리조나로 가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 이민자 커뮤니티로서 반이민 법안에 반대하고 포괄적 이민 개혁의 목소리를 전달할 것이다.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는 분들의 많은 지지와 성원, 그리고 참여를 부탁한다.
윤희주 / 민족학교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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