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아침은 눈이 부시다. 하늘 높이 전략 공군기 한대가 흰줄을 길게 늘이고 버지니아 상공을 날아간다. 어디로 저렇게 급히 달려가는 것일까? 60년 전 구포의 하늘에도 그랬다. 나와 조카는 쌕쌔기 소리가 나는 하늘을 처다 봤다. 나는 장난꾸러기였다. “명아 간장을 먹어봐, 그러면 보이지!” 그래서 어린 조카는 부엌에 가서 그 짠 간장을 먹고 나와서 하늘을 바라봤다. 아, 어느새 한줄기 흰줄이 길게 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조카는 이후로 수도 없이 짠 간장을 먹었다. 끝내 비행기는 보지 못 한 채.
6.25때 나는 포성을 듣지 못했다. 누군가 깜깜한 밤중에 나를 등에 업고서 흑석동에서 관악산 꼭대기까지 데리고 갔다. 누구인지 전쟁이 났으니 잠깐 피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피난길은 시작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부모님을 따라 걸었다. 조치원에선 누나를 잃어버려서, 남하하는 마지막 기차를 놓쳤다. 모두들 누나를 찾아 해매는 동안 기차는 떠났다. 없다는 기차가 왔다. 먼저 간 기차는 아군 비행기의 오폭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했다. 모두 말은 않지만 그 누나에게 고마워한다.
맨 아래 휘발유통(도라무 깡통) 위에 앉은 우리는 군인들이 아래로 던지는 담배꽁초 때문에 가슴을 졸이고, 어쩔 수 없었겠지만, 급한 대로 쏴 버리는 따뜻한 물세례를 받아도, 말 한마디 불평도 못했다. 아이스케끼(아이스 바)를 사달라는 동생만 꾸짖었다.
감천국민학교에 없는 피난짐을 풀었다. 단체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가엾게도 감천바다의 신비함에 미쳐버렸다. 물바위에 앉아 바다 속을 들여다보며 자랐다. 바다 것들이 유년의 친구가 되었다.
수복 길에 처음으로 국군과 인민군의 시체를 봤다. 돌아오니 우리 집은 아무것도 없는 텅텅 빈집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주홍색 풍금만이 누이들 방에 남겨져 있었다. 누나의 친구가 우리집을 접수한 빨갱이였다는데, 누나를 생각해서 풍금은 남겼던 것일까?
삼촌 두 분이 월북을 하고, 사촌형은 경리장교로 후생사업을 했다고 군복무 중 총살을 당할 뻔했다. 윗집 주인은 빨갱이들이 국군을 숨겼다고 부인과 함께 동네 사람들 앞에서 교수형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우연히도 국군묘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 수시로 그곳에 갔다. 김 일등병 사망, 6월 26일 1950년 등의 이름을 읽어 갔다. 너무 숙연해져서 발소리마저 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죽어 가야만 했을까?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국군묘지를 가끔씩 찾아 갔다. 고독한 감정이 쏠려왔다. 이들이 다 나의 형제와 같은 느낌이라 할까.
이 먼 이국땅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한 이때에 천안함 피격으로 목숨을 잃은 가족들의 눈물 때문에 늦게나마 나는 6.25의 눈물을 흘린다. 북한은 남침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최근의 남한에 대한 도발과 위협을 멈추고, 역사 속에서 끊임 없는 한국민의 눈물을 깨끗이 지워야 할 때다.
지금이야말로 6.25세대가 마지막 죽기 전에 보고 싶은 평화를 이루고 한민족 한 국가를 다시 세우는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통일을 이루기 위한 시작이다. 서로의 용서는 서로 사랑하기보다 쉽고, 서로의 사랑은 서로 이해하기보다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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