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8일 아침 11시경, 나는 한강 인도교 북단 입구에 서 있었다. 당시 중학교 2년인 15세 소년으로 전날 밤 피난길의 혼란 속에 어머니와 동생들로부터 낙오된 채 남대문 시장 친척집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일찍 삼각지 용산을 지나 어머니를 찾아 한강교로 나선 거였다. 신길동의 외갓집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생각, 한강교를 건너면 되리라고 쉽게 생각했었다.
고급 공무원이신 아버지는 26일 이후 소식이 없고 육군 중령인 형은 전선으로 출동, 가족 모두가 연락을 못한 채 흩어져 하루 만에 고아 신세가 된 거다. 28일 새벽1시 인민군 105탱크 여단소속의 10여대의 탱크가 미아리 고개를 돌파, 시내로 침투해 시가지를 종횡무진으로 휘젓고 트럭으로 무혈 입성했다. 인민군은 중앙청 및 방송국을 장악함으로써 서울은 하루 아침에 인민군 천하가 됐고 민족의 비극은 시작됐다. 한강로 북단에 20여대의 탱크가 종대로 서고 탱크병들이 도열한 후 곧장 여단장인 유경수 상좌가 미 대사 무쵸가 버리고 간 고급세단을 타고 도착해 부대 사열을 했으며 곧바로 참모들과 승전 축하 함성이 소리쳐 나왔다.
휴식에 들어간 병사들은 미군이 버리고 간 C 래이숀 박스를 갖고 와서 깡통을 대검으로 따서 게걸스럽게 먹었다.
최강 선봉대인 인민군 6사단은 팔로군 출신으로 최후의 낙동강 영산 전투에서 미군의 막강 화력과 공중폭격으로 완전 분해됐다. 도강 패퇴 시 집중 포화에 의해 낙동강을 피로 물들게 한 처참한 말로로 병사들이 소멸됐다. 다리 입구 뚝방에는 50여대의 차량들이 버려져 있고 미 대사관 승용차들에는 비상식량 등이 가득해 인민군들이 분산해 먹기 시작했다. 전쟁은 끝난 듯 앳된 소년병들은 키보다 긴 장총을 매고 양담배를 신기한듯 피고 따발총을 무차별 쏘았고 멀리 강 가운데에는 나룻배 서너 척이 피난민과 국군 패잔병을 가득 태우고 간신히 도망쳐 갔다.
파출소에는 경찰 서넛이 집단 사살된 채 서로가 부둥켜안고 죽었고 강뚝 아래에는 버리고 간 총포 등이 수도 없이 흩어져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다리에는 80여대의 차량이 군인들을 만재한 트럭, 야포를 견인한 포병차 등 민간인이 가득한 버스 등으로 차도를 메웠고 인도에는 군인과 민간인들이 뒤섞여 시신들로 도배하다시피 깔려 있었다. 중지도에서는 시신들로 발 디딜 곳이 없어 전진하기 힘들었다. 6월의 타는 듯한 태양열로 풍선같이 부푼 시신에서 내뱉는 악취들로 질식하듯 손으로 코를 감싸고 최후의 교각 끝까지 이를 악물고 강행, 드디어 단말마의 현장에 도착 공포와 경악으로 사지가 뒤엉켜 주저앉았다.
떨어져 나간 다리 끝에서 강물까지 차량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그 속에는 수없이 시신이 탄 채로 흩어지는 등 지옥의 현주소였다. 또한 수없이 물위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동작이 정지된 전쟁 영화의 순간 화면이었다.
예정 보다 빨리 폭파함으로써 미처 후퇴 못한 5개 사단과 지원부대가 야포 등 중장비 중화기 등을 버리고 도강 패퇴함으로써 70% 이상의 전투력을 손실하고 잔여 병력 2만5천으로 급감하여 차기 전투에 막대한 손실을 자청한 최악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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