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국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내가 소속해 있는 등산동호회 자리 하나를 빌어 중부지방에서도 명산인 원주 치악산 등산길에 올랐다. 정상을 향하여 중반 쯤 올랐을 때인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검은 물건이 언뜻 보이기에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주워보니 얇아 보드라운 새 가죽 장갑 한 짝이 내 손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그냥 그 자리에 도로 놔두고 지나칠까 하다가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등산객들의 발길에 처참히 밟힌 나머지 끝내는 나에게 까지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애처로움이 피어나는듯하여, 바로 옆에 있는 나뭇가지에 잘 보이게 걸어 두었다.
다시 산행을 계속하면서 조금 전의 가슴 뛰는 분위기 대신 묘한 궁금증이 나의 모든 감각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을 느꼈다.
“누가 잃어 버렸을까?”
여자의 가죽장갑을 만진 촉감을 더듬으며 잠시 그 주인이 되어 본다. 손의 크기로 보아 이 장갑의 주인은 결혼식을 얼마 전에 마친 신혼초의 새댁이 틀림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 때도 끼워 보지 못했다가 오늘 추운 새벽 치악산을 향해 남편 따라 등산을 떠나오며 어쩐지 필요할 것 같아 가지고 와 다시 한 번 끼워보는 순간에 익숙하지 못한 행동으로 흘려버린 것이리라.
여고 시절 짝꿍인 수줍음 덩어리 수연이가 나에게 결혼선물로 선물한 감촉이 배어있다. 나이까지 철부지인 나는 어머니 생각 한 번 못하고 그 장갑을 끼고 시집을 왔다. 수연이가 사준 날, 어머니께 자랑을 하며 “엄마! 한 번 껴봐!” 하자마자 어머니는 안 들어가는 장갑을 억지로 끼시더니 “참! 좋구나!” 하시면서 부러워 하셨던 생각이 난다. 왜 그때 ‘그럼 엄마 낄래?’ 하고 선뜻 드리지 못하였는지.
“이렇게 잃어버릴 줄 누가 알았나? 뭘……” 앞으로 친정어머니 뵙기가 쑥스러워지는 새 새댁의 장갑이었을까? 아닐 거야. 이쯤에서도 벌써 중년의 냄새는 숨기지 못하겠는 걸. 자식을 다 키워 놓은 중년 여인의 장갑일 거야.
내 자식이 나만큼의 키를 넘어서 이젠 안아 볼 수도 없는 체구로 자란 아들을 바라볼 여유조차 몰랐으니, 내 손에서 귀중한 물건이 하나쯤 떨어져 나가는 그 무딘 감각을 더 깨달아 알리는 없는 듯했다.
지난해, 몇 번째 결혼기념일인지? 가을 햇살이 힘을 잃어 가는 저녁나절. 오수(午睡)를 달콤하게 즐기고 있는 나를 남편은 전화로 불러내더니 “아마 오늘이 30주년 기념일이지! 갖고 싶은 선물 하나 골라 봐!” 하는 남편의 말에 너무 감동해 무얼 고를까 하다가 남편의 주머니 사정도 감안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장갑인 것 같아 야하지 않은 이 엷은 검은 가죽장갑을 고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너무나 숨 가쁘게 달려온 아내와 엄마의 자리. 며느리 자리까지... 나는 아플 래야 아플 새가 없는 시간들을 주무르고 있었다.
내 생애 붉은 노을의 잔해가 비늘처럼 나열된 세월의 뒤안길에 서 그런 것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고, 끼워 볼 사이 없는 장갑을 옷장 서랍 안에다 잠재워 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원주 치악산에서 있다는 전갈을 받고서는 곱지 않은 손도 가릴 겸, 이 추운 날씨에 손끝으로 오는 노색(老色)도 묻을 겸해서 끼고 나온 장갑이 손가락에 습관 되지 않은 무딘 신경에, 벗어서 들고 다니다가 흘러 떨어진 것이리라.
내려 올 때 다시 그 장갑을 안보길 원했지만 저 만치서 아직도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발길이 뜸해진 등산객의 눈길을 궁금하게 담고 있었다.
이렇게 외진 산에 아무도 없는 캄캄한 산골짝에서 무섭게 밤을 지새우는 ‘슬픈 일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함께 남겨 놓고 하산을 서둘렀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