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날씨에 어느덧 나뭇잎들이 주홍 고운 빛깔을 입은 것을 보니 가을이 성큼 저만치 다가왔나 보다. 가을은 아무래도 상념의 계절, 한껏 푸른 위용을 자랑하던 이파리들이 산들 바람에도 맥없이 길바닥으로 떨어지는 이 계절은 언젠가는 이곳을 반드시 떠나야 하는 인생의 모습을 닮았기에 가을은 인생을 더욱 차분히 돌아보게 한다.
오랫만에 피터, 폴, 메리가 부른 “Leaving on a jet plane”이라는 옛 노래를 들었다. 월남전이 한창인 1960년대에 불렸던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이 노래는 언제나 슬픈 추억을 되살리게 한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여 동기가 되었다는 ‘통킹 만’ 사건은 조작극이라 들었다. 베트남의 요청도 없이 실질적으로는 미국군의 용병이 되어 가난했던 우리 조국의 피 끓는 5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전사하고, 만 5천여 명의 부상자와 고엽제 후유증 등 많은 상흔을 남긴 이 전쟁은 역사에 완전 실패한 전쟁으로 자국을 남겼다. 전쟁 중 불린 이 노래의 내용은 결혼할 애인을 뒤에 두고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전선을 향해 가기 싫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나야 하는, 돌아올 때는 결혼반지를 가지고 오겠다며 꼭 기다려 달라는 젊은이의 간절한 호소이다. 나를 결코 떠나보내지 않을 것처럼 꼭 붙잡아 달라고 애절하게 부르짖는다.
1960년대말에 나는 동두천 미 7사단에 카투사로 병역 복무를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미군들이 마리화나를 피고 막사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음악을 틀고 했던 스테레오 시스템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 당시 막사에서 위에 말한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내용도 가사도 잘 모르지만 이 노래가 좋아서 그저 엉터리로 비슷하게 흥얼거리며 다녔다. 내 옆 침대는 조그마한 하얀 얼굴에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생글생글 웃기를 잘하는 ‘Freeborne’이라는 미군이 차지했는데, 이 친구는 나의 엉터리 노래를 듣고 깔깔 웃으며 이 노래를 제대로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근무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오니 그 누구도 입을 열려하지 않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였다.
누군가 나에게 Freeborne이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날 아침에도 서로 농담을 하며, 특히 그날은 그의 20세가 되는 생일이라 축하해 주었는데, 그가 그날 오후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날은 생일이라 근무가 면제되는데, 동료가 급한 일로 대대본부까지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운전병을 구하지 못해 운전병인 이 친구에게 부탁을 해 가게 되었다 한다. 영내에는 그리 깊지도 않은 작은 강줄기가 흐르는데, 전날 폭우로 젖어 미끄러운 다리를 건너다가 트럭이 미끄러지면서 다리 난간을 받고 강물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했다.
20세의 하얗고 조그마한 이 친구는 이국 만리타향 땅에서 그렇게 어이없이 세상을 떠났다. 가기 싫은 전쟁터를 향해 떠나야 하는 애절한 노래의 주인공 청년처럼, Freeborne도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한국땅에 억지로 떠밀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저녁때만 되면 휘파람을 신나게 불며 몸을 흔들고 걷는 그가 꼭 걸어 들어올 것만 같은 수많은 밤을 보냈다. 이 친구의 누나에게서 동생의 트럭이 떨어진 다리라도 보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 그 다리를 눈물로 사진에 담아 검은테를 둘러 그 누나에게 보내주었다.
우리는 이 “Leaving on a jet plane” 노래의 청년처럼, 또한 그렇게 허망하게 짧은 인생을 마감한 이 동료처럼 언젠가는 이곳을 꼭 떠나야만 한다. 소슬 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육신의 장막을 벗어야만 한다. 사랑도, 미움도, 고운 것도 그리고 추한 것도 다 뒤에 놓고 떠나야만 한다. 되도록 미움과 추한 모습은 조금 남겨놓고 떠났으면 좋겠다. 전신마비 구필화가 한미순 자매의 수필집 “사랑할 시간도 없는데 왜 미움을”이란 제목과 같이 더욱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이 바람의 결실을 올해는 좀 더 많이 거두는 풍성한 가을을 기대해 본다.
박찬효
FDA 약품 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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