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코리안 퍼레이드가 개최될 때 마다 지금부터 91년 전, 1919년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박사가 주도했던 ‘코리안 퍼레이드’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 그리고 그때의 한인사회와 지금의 이민사회를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같이 큰 차이가 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그때 퍼레이드는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안고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삼일만세운동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한 비장한 행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우리 ‘코리안 퍼레이드’의 원조다.
당시 이 퍼레이드를 주도했던 서재필 박사는 55세였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나라를 개혁하고 조국의 미래를 바꿔 보겠다고 갑신정변을 도모했던 젊은이 서재필은 소용돌이치는 구한 말 한국 역사의 무참한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사일생으로 망명의 길에 올라 일본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오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귀한 그릇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니 석탄재벌 홀렌박을 ‘천사’로 보내어 그를 구제하고 고등학교로부터 미국의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그의 능력과 주류사회와의 커넥션은 3.1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1919년 4월14일부터 16일까지 최초의 한국인 대회를 열고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대회에는 약 150명의 한인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이 시가행진을 할 때 필라델피아 시의 밴드와 기마경찰이 동원되었고 수많은 시민들과 지도자들도 합세했다고 한다.
그날 퍼레이드에는 이승만 박사와 정한경 선생 등 독립 운동가들이 같이 행진했으니 그들이 오늘의 한인사회와 자랑스러운 코리안 퍼레이드를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놀라고 감격스러워 할까 생각해 본다. 지나간 우리 민족의 선구자들을 기리며 언젠가 오고야 말 ‘통일 한국의 퍼레이드’를 꿈꾸어 본다.
김해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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