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낡아서 남루해진 옷을 벗듯 LA에도 자연스레 낙엽이 진다.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하던가? 가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가을빛이 내는 절묘한 색조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시간 속으로 스러져가는 한해의 끝을 예감하게 하는 낙엽의 애틋함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가 남겨두고 떠나가야 할 시절들이 젖은 땅에 갓 떨어진 낙엽처럼 스산한데 그 섭섭함이 회화적이고 음악적인 구르몽의 시 구절에 녹아 새삼스럽다.
시몬,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중간생략)/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레미 구르몽의 ‘낙엽’ 중에서)
며칠 전 친구로부터 오래된 시집 몇 권을 소포로 받았다. 친정집에 들러 짐 정리를 거들다가 찾아냈다며 다정한 편지와 함께 보내준 그 낡은 시집들을 읽으면서 난 오래 전 내가 두고 떠나왔던 많은 것들을 기억해 내고, 상실로 인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시집을 몇 권 구입해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그리운 이들에게 소포를 보냈다
시라는 단어처럼 가을에 알맞는 것이 또 있을까? 오랜만에 읽어보는 시 구절 속 과장되지 않은 시인들의 절제된 목소리는 삶의 번잡함을 걷고 우리의 가슴속에 아늑하게 울리며 긴 여운을 남긴다.
오래된 시 구절 속에는 빛났으나 덫을 숨기고 있던 우리들 청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마치 멀찍이 서서 봐야 제대로 보이는 풍경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읽던 시집을 덮지 못한 채 다가오는 어둠속에 우두커니 앉아있기도 했다.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 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박경리의 ‘산다는 것’ 중에서)
친구가 책갈피해서 보낸 로버트 프로스트의 영시 ‘가지 않은 길’을 “길은 길로 뻗은 것이기에” 되돌아갈 수 없게 된 지금 다시 읽어본다.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난 나그네 몸으로 두 길을 다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중간생략)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 놓은 것입니다”라고
내가 가지 않고 남겨둔 그 길, 그 무정한 출발점에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고 싶어지는 가을이다. 가을 햇살이 명주실처럼 낭창거리는 한나절쯤, 긴 시간 열어보지 않던 서랍을 열듯 낡은 시집을 먼지 털어 펼쳐보자. 오래 전 내가 접어놓은 책갈피 속에 이제는 소실점 속으로 사라져 아련해진 내가, 나의 여린 감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며 잃어버린 그 옛날의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내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운 이들에게 오늘은 시집한 권쯤 불현듯 보내보면 어떨지….
<앤드류샤이어 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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