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아침저녁 소슬바람, 길가의 하얀 갈대꽃과 알록달록 물든 나무 잎,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어기 떼의 끼룩끼룩 울음소리 따위가 중추 분위기를 돋운다. 어제는 찬 이슬이 내리는 한로(寒露)였고 보름 후면 무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이다. 가을이 어느새 막바지로 치닫는다.
그런데, 가을 분위기는 자연현상보다 문화에서 더 많이 우러나는 듯하다. 한국에선 ‘문화의 달??(10월)을 맞아 다음 주말 예향의 도시 목포에서 대규모 문화축제가 펼쳐진다. 창작 뮤지컬 ‘목포의 눈물’이 초연되고 유달산 노적봉에서 삼학도까지 1,000여명이 강강술래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문화체육관광부와 목포시가 합동으로 6가지 남도문화 잔치와 12가지 항구문화 마당을 마련한다.
시애틀도 10월이 사실상 문화의 달이다. 시애틀 심포니가 10월 들어 금년시즌을 개막했다. 북유럽 문화잔치인 ‘10월 축제(Oktoberfest)’가 독일촌(레븐워스)에서 오늘과 다음 주말(15~16일), 퓨알럽에선 오늘과 내일 펼쳐진다. 무엇보다도, 시애틀 사람들은 올 가을 아주 귀한 문화행사를 접할 기회를 얻었다. 평생 보기 어려운 피카소 작품전이 어제 시애틀 미술박물관에서 개막됐기 때문이다.
가을 문화행사엔 시애틀 한인사회도 꿀리지 않는다. 미술협회 회원전 및 학생공모전 입상작 전시회가 머서 아일랜드의 머서 뷰 화랑에서 22일까지 열리고 있다. 일주일 전엔 음악협회가 워싱턴대학 미니 홀에서 연례 가을 음악회를 열었다. 오늘 저녁엔 문인협회가 빌립보 장로교회에서 협회지 3호 출판기념회와 함께 문학의 밤 행사를 연다. 10월에 미술·음악·문학 3박자를 모두 갖추게 된 셈이다.
한인사회 문화행사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지난 2일 가을음악회에서 필자는 신바람이 났다. 등산하고 온 후여서 졸음이 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피곤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지난 5월 두 주말에 걸쳐 잇달아 개최된 ‘열린 음악회’와 ‘글로리아 체임버 앙상블’ 창립 연주회 때도 그랬었다. 90년대까지 LA에 살면서 숱하게 많은 한인음악회에 가봤지만 관람 후의 기분은 대개 씁쓸했었다.
음악협회는 이번 공연을 위해 클래식에서 팝까지 17곡의 레퍼토리를 골랐다. 모두 청중의 귀에 익은 곡들이었다. 클래식도 기악곡(헨델의 수상음악 조곡), 피아노 솔로(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모차르트 5번), 첼로 협주곡(하이든 1번)에 오페라 합창곡(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까지 넣는 등 다양하고 세심하게 선곡한 표가 났다.
이날 공연의 황미나 지휘자는 시애틀 한인음악의 높은 격조와 수준을 상징적으로 과시했다. 바로크 음악에서 60년대 히트 팝(사이몬&가펑클의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까지 섭렵한 전천후 지휘자일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16인조 UW 앙상블에 맞도록 편곡까지 해냈다. 어렵기로 이름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중학생 이민수군과 하이든 협주곡을 연주한 초등생 첼리스트 크리스티나 김 등 청소년 콩쿠르 수상자들의 연주는 이츠학 펄만이나 요요 마의 연주보다도 더 흐뭇하게 들렸다.
그날 기분 좋았던 이유는 또 있다. 군소리로 시간을 잡아먹기 일쑤인 사회자가 없었다. 출연자들이 알아서 걸어 나와 자기 순서를 마친 후 다음 출연자와 빠른 걸음으로 교대해 시간누수가 없었다. 2시간도 채 안 되는 공연에 17곡이나 들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한인사회 행사의 고질인 유명인사들의 장황한 축사도 없었다. 이하룡 총영사도 참석했지만 축사는 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 전체 출연진과 함께 무대에 선 이수진 회장의 “여러분, 즐기셨나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짤막한 인사가 전부였다.
가을음악회가 열린 이날 날씨는 시애틀 가을답지 않게 청명했다. 그래선지 좁지 않은 공연장이 초만원을 이뤘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런데, 음악회 출연자들과 달리 관람객들의 수준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관객은 아래 칸에서 억지로 좌석을 타고 넘어와 필자 옆자리에 앉았다. 입구 쪽에 서 있는 친지를 향해 프로그램 팸플릿을 흔들며 “이리 와…여기 자리 있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무 매너’는 참을 만하다. 문화인을 자처하면서 문화행사에 가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다. 음악회든, 문학회든, 전시회든 한인사회에서 열리는 문화행사에 가능하면 많이 참석하는 게 좋다. 그래야 예술인들이 가을철에 더 많은 문화행사를 개최할 의욕이 생긴다. 삭막한 이민생활, 더구나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 일수록 문화행사(공짜다)를 즐기면서 기분을 전환하고 에너지를 충전해둘 필요가 있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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