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지 아주 오래 된 얘기다. 한국 문인들 여럿이 유럽에서 열린 세계 펜클럽 모임에 참가한 후 귀국 길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한 남성 문인이 도쿄에서 택시에 당연한 듯이 먼저 오르던 여성을 밀치며 “여기는 동양입니다”라고 외쳐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것이다. 유럽 여행 중 익숙지 않은 ‘레이디 퍼스트’의 신사도를 지키느라 고생했을 한국 남성과 잠시나마 여성 우선이 습관화되어 우쭐했을 여성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중국에서는 자녀를 하나만 갖자는 운동이 일자 여아의 수요가 줄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는 ‘칠거지악’이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 포함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 즉 시집에서 쫓겨날 때의 ‘자식 없음’은 남아를 가리킨다. 이런 사회 풍조가 오래 지속돼 왔다.
세계 여러 나라의 성 평등지수가 발표되었다. 한국은 전보다 좀 좋아진 편이지만 135개 나라 중에서 100위를 벗어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이 현상을 이렁저렁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상이다. 모두 조용하다. “그러려니” “그럴 수밖에” “좋아지고 있으니까 다행”이라는 등등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방면에서는 북 유럽이 앞섰고, 아시아는 유럽에 훨씬 못 미친다. 특히 놀라운 것은 역사적인 바탕 때문인지 우리들 자신이 남녀평등을 저해하면서도 이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인식을 규정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는 말 속에 종종 차별의 의식이 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이 남녀 차별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남자가 먼저 선택하고, 다음은 여자 차례” “남자는 장래 이 집을 이어갈 사람이고, 여자는 시집갈 것이고” “오빠를 먼저 대학에 보내자. 네 학비를 마련할 동안” “남자에게 덤비다니 어디 여자가” 등등 가정에서 생각 없이 사용하는 이런 말들 속에는 심각한 성차별 의식이 담겨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대항하는 상대가 아니다. 경쟁의 대상도 아니다. 남녀는 제각기 가지고 있는 특성을 살리면서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남녀를 특별히 갈라놓아야 할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모두 이리 와서 앉으세요” “태권도를 배우고 싶으면 체육실로 가고, 한국무용을 배울 학생은 무용실로 가세요” “키가 작으면 앞에 앉고, 키가 크면 뒤에 앉으세요” “힘이 센 학생은 책상을 운반하세요” “힘이 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도우세요” “다른 사람을 친절히 대하세요” 등 남녀 구분이 없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획일적으로 규정하는데서 차별의식은 싹튼다.
요즘 국격, 즉 나라의 품위에 대한 의견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것 같아 유감이다. 얼마 전 칠레 광부 구조에서 보인 질서 있는 작업과정, 구조 현장, 광부들의 낙천적인 언어와 태도, 가족과의 절제된 만남 광경 등을 보면서 국격이 높은 나라임이 부러웠다. 국격은 표면에 보이지 않다가 큰 일이 생기면 수면 위로 나오는 것 같다. 국격은 일상생활에서 길러지는 것이고, 정신적, 물질적인 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높아진다.
국민의 애국심, 공중도덕 이행, 남녀 평등지수, 교육 정도 등을 바탕으로 경제생활이 향상될 때 균형 잡힌 국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남녀 평등지수에 결코 무심할 수 없다.
허병렬 /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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