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LA 다운타운의 한 노인 아파트 관리 사무소 앞에는 오전 9시부터 나눠주는 입주 신청서 한 장을 받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몇 백명의 입주 희망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서있었다.
LA 지역 노년층 사이에서는 꽤 인기 있는 이 아파트에서 8년 만에 입주 신청서를 내준다고 하자 그 전날부터 북새통이었다. 성미 급하기로 소문난 동포들의 극성 덕분에 그 전날 이미 줄을 서서 순번을 정한 흰색 번호표를 받았다. 추운 날씨에 길게 늘어서서 번호표를 받아 쥔 것도 잠시, 조금 전에 받은 번호표는 무효라는 것이었다. 다시 줄을 서서 파란 종이에 친절하게 사인까지 곁들인 두 번째 번호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번호표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도하며 집에 돌아온 시각은 22일 새벽 2시경이었다.
입주 신청서는 아침 9시부터 나눠준다는 것을 감안해 두 시간 정도 여유를 둔 7시쯤 눈을 뜨자 기다리기라도 했던 듯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어젯밤 두 차례 나눠준 번호표는 무효처리 되고 또 다시 세 번째 번호표를 나눠주고 있으니 빨리 나오라"는 친척의 고마운 전화였다.
급히 서둘러 아파트 현장에 나가보니 이미 길게 늘어선 행렬은 그 전날의 몇 갑절은 되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내 순서가 되어서 신청서 한 장을 받아들고 나니 전신에 힘이 빠지며 허허로운 웃음만 나왔다.
애당초 번호표 확인 절차 따위는 없었던 것이었다. ‘번호표’는 나서기 좋아하는 누군가의 잘 짜여진 시나리오였다. 결국 전날 밤 자정이 넘도록 서서 받은 번호표는 공수표 같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번호표를 받기 위해 한번도 아닌 세 번씩 아귀다툼을 벌인 일이 마치 남의 장단에 놀아난 듯 한 괴이한 허탈감을 불러왔다. 기분 전환을 위해 허공을 향해 큰 목소리로 "산다는 것은 코미디야"하고 외쳤을 뿐이었다.
남응희/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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