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누나와 어머니)은 부모님이 이혼하신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오기로 했다. 어머니는 이민 생활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내고 미국에서 자녀들에게 더 나은 삶을 찾아보기로 했다. 절망보다는 당신의 꿈과 희망에 귀 기울이기로 하신 것이다. 나는 그때 11살이었다. 미국으로 간다니, 흥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 고향이라 부를 이 땅에 정착하자 마자 큰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나는 또래의 어린이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공립 학교를 다니고, 어려운 수업을 많이 들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학생회와 농구에 참여했다. 나는 대학에 가고자 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 우리 가족의 이민 신분에 대해 알게 되었다. 미국에 방문 비자로 들어왔는데 그게 이미 만료 돼서 우리는 서류 미비자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인생이 멈춰서는 것 같았다. 인생의 한장 한장을 넘기면서 느낄 흥분이 걱정과 두려움, 수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랜 기간이 지난 지금도 내 신분문제를 밝히는 것은 어렵고 망설여진다. 하물며 고등학생으로서 당시 그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인인데, 서류미비자, 소위 말하는 불체자라니! 어머니는 이 일을 최대한 숨기라고 당부하셨다. 내가 서류미비자라는 것을 밝히면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뒤에서 수군거리며 그저 한 명의 불체자로 밖에 보지 않을 것이라고. 이민 신분이 밝혀지면 어머니와 누나가 겪을 사회적 낙인이 해소 될 때까지, 더 좋은 날이 올 때 까지 기다려보라고. 어머니께서는 그런 당부를 하셨었다. 가족에 누가 되기 싫어서, 친구들을 잃을 까봐 두려워서,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갈 뿐이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 자신에게 숨겨진 용기를 끌어내야 하는 날이 오게 된다. 나의 경우 그것은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니라, 여러 순간에 걸친 점진적 변화였다. 한 계기는 나처럼 서류미비자 신분인 한인 대학생들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또 다른 순간은 드림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지치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였다. 또 사회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진정성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러나 동시에 괴로운 순간도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 이었다. 어머니의 눈물 속에는 수년간의 고통과 자기 희생이 녹아 있었다. 차별과 욕설 그리고 착취를 견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리 어머니의 희생은 당신이 이민 법을 어긴 범죄자라는 것으로 귀결 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삶은 자녀들에게 행복, 오직 그것만을 선사하고자 했던 한 부모의 삶이었던 것이다.
나의 삶을 털어 놓음으로써 한인 커뮤니티가 한 마음이 되고 미국 이민 제도의 복잡성, 그리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민자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한인 7명 중 1명이 서류 미비자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서로를 단죄하고 대화를 차단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족처럼 다 같이 단결하는 것이 한인 사회를 위해 더 낫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한 커뮤니티인 것이다.
홍주영 /UC버클리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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