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새도록 불어대던 눈보라가 코요테 우는 소리를 내면서 창문을 흔드는 바람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침실을 휭휭 떠돌고 있던 냉기가 콧등을 스쳐감이 맵도록 싸늘하다. 새벽은 찾아 왔는데 아직도 전기가 들어 온 흔적이 없다. 실내의 체감 온도가 빙점을 오르내릴법한 강추위에 새삼 한기를 느끼며 어릴 적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사발의 물이 얼어붙었듯 한국의 겨울이 생각난다. 개스가 없이 오직 전기 일변도의 온냉방 장치를 한 우리집은 전원이 끊기면 자연의 심술 앞에 이토록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인간이 발명한 최고 문명의 이기인 전기가 그 기능을 잃으니 TV가 끊기고 유선무선의 통신이 마비되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시켜 놓았다. 컴퓨터마저 작동이 되지 않는다. 걸리버씨가 북극에 표류한 것이다. 정전의 충격은 연쇄 작용으로 이어지고 전화도 불통인데 화장실 변기용 물 서비스마저 일회에 한한다고 못을 박는다. 물을 채우는 데에도 전기의 힘을 빌리기 때문이라 한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행동이 제한된 이 환난의 날에 신체 장애인들을 생각해 본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할 수도 없는 역경을 이겨내고 인간승리를 찬양한 헬렌 켈러, 90일이란 기나긴 날들을 3천 피트 지하 갱도에 갇혀 찜통 같은 더위와 습기 그리고 배고픔 3중고에 맞섰든 칠레 광부들의 시련과 비교하면 촌각에 끝나게 될 이런 사소한 재난쯤은 불평의 대상도 되지 않을 터이니 그저 인내로서 받아들여야 할 피치 못할 현실이다.
돌이켜 보면 인류가 일구어 놓은 물질문명은 우리들 습관을 너무도 많이 잘못 길들여 놓았다. 가마솥에 불 지펴 밥을 짓고 희미한 등잔불로 거의 방 하나를 채워 가며 밥상에 둘러 앉아 저녁 식사를 나누던 정경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스위치 하나로 밥이 끓고 마이크로 오븐에 국을 데워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불과 30분을 넘지 않은 스피드 시대가 되었다. 구수하고 향수 어린 숭늉은 어느덧 커피라는 습관성 음료로 자리 바꿈 한지도 몇 세월이 지나 버렸다. 잠시 나마 편리주의란 허울을 벗어버리고 나 자신으로 돌아가 본다.
이 사회에 태산 같은 신세를 지고 살아온 나는 너무도 감사할 것이 많다. 가슴 깊이 숨을 내 쉴 수 있는 건강이 있고 눈을 뜨면 찬란한 광명이 보이며 힘차게 움직일 수 있는 손발을 갖고 있다. 귀를 기울여 아름다운 자연의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너그러운 손길로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 있으니 이것 또한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밤새 내린 눈은 월척이 넘게 쌓였을 것이고 눈사태를 뚫고 나갈 차고 문마저 요동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도 정전의 피해자이다. 필경 오늘 하루는 방안에 감금돼 무료한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다. 주옥 같은 성경 말씀들은 나를 거듭나게 하고 새 힘을 주어 독수리 날개 같이 하늘을 날게 하리라. 광란의 장마당에서 벌어지는 허위와 위선의 탈을 쓴 서커스 행렬을 보지 않아 좋고 검은 전화통은 옆에 앉아 입을 굳게 담고 침묵을 지켜줄 터이니 지극히 고요한 하루가 될 것이다.
이윽고 나는 게으른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눈삽을 손에 들었다. 왁자지껄 이웃 청춘들의 눈 치는 소리가 모처럼의 정적을 깨뜨리고 말았다. 결코 바람 잘 날 없는 데자뷰의 또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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