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급보를 통해서 일본 동북부 해안을 쓸고 가는 쓰나미를 지켜보던 첫날밤, 우리들은 생각도, 언어도 모두 잃어 버렸다. 죽음 같은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케롤과 아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케롤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로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살며시 이불을 걷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발소리를 죽이며 이층으로 가 슬그머니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어둠속에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아들의 하얀 두 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마웠다. 집에서 자고 있다는 것이. 손으로 그 발들을 만져 보았다. 따스한 체온이 온 가슴에 파고들었다. 이불을 잡아당겨 넉넉히 덮어주고 방을 나왔다. 아직도 이른 봄이라 바깥바람이 차가웠다.
밤하늘에는 별빛이 총총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달빛이 파도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따라나선 일본원산 개, 시바이누 ‘재만’이가 하늘을 쳐다보며 요란하게 짖어댔다. 자연은 역시 아름다웠다. 우주를 창조한 야훼 자신이 여섯 번씩이나 “참 아름답다”고 감탄했던 우주의 그 모습 그대로다.
창조 후 단 한 순간이라도 아름다움을 잃어 본 적이 없는 것이 곧 우주이고, 자연이다. 지진과 쓰나미 또한 자연의 한 몸짓에 불과할 것이다.
문득 지난 날 나를 남겨두고 떠나갔던 친구들, 그리고 어딘가에 내가 남겨두고 떠나온 친구들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한 송이 백합꽃 같은 아름다운 인연들이었다.
한 무명시인의 시를 마음에 담아 밤하늘에 띄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 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무명시인의 시에서).”
강진과 쓰나미가 일본 열도를 휩쓸고 가기 이전에 나는 분명히 홍난파의 ‘봄처녀’ 가곡을 부르면서 찬란한 봄을 꿈꾸고 있었다. “머리에 하얀 너울을 쓰고, 진주이슬을 신고, 새 풀옷으로 단장한 대륙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T. S. 엘리어트의 시를 읽으면서 매정하리만치 잔인한 서구인들의 정서를 마음속으로 질타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는 절규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일본 열도의 봄은 잔인했다. 아니, 잔인할 정도가 아니라 원자탄이요, 수소탄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소중했던 것들과의 이별은 늘 쓰나미 같았다. 한밤중에 도둑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가 천둥번개처럼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가 버리곤 했었다. 어머님도, 작은형도, 첫사랑도, 그리고 청춘도, 모두 그렇게 떠나갔었다.
아니 그들이 죽음으로 소리치며 무슨 말인가를 남기려고 했는데도 당황한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 순간 나에게 그리스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통속의 철인 디오게네스에게 했던 동일한 말을 하고 계실 것이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내가 무엇이든 들어 주겠다”고, 그러나 나는 디오게네스처럼 “햇빛을 가리지 말고 좀 비켜주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을 크게 소리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고 애걸을 할 것이다.
나는 생을 마감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침묵만을 남긴 채 도둑처럼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을 되도록 많이 남겨둘 것이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하는 칼릴 지브란의 겨자씨만하게 작은 사랑의 말이라도 자주자주 남겨두고 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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