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엄마는 힘든 전쟁을 겪으시며 고생의 비 내리는 세월을 살아 오셨다. 그런 날들 속에서도 생전 아픈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셨다. 거기에다 본인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의 인생도 함께 짊어지고 살고 계셨다. 외삼촌, 외할머니도 함께 사셨으니 힘든 생활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시더라도 그저 자식들의 안위와 미래를 위해 참고 지내시는 듯했다.
헐벗고 굶주린 전쟁통의 시간들에서도 엄마는 다른 식구들에게 의식주 걱정을 모르고 살게 하셨다고 외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식들을 바른 길로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하며 많은 날들 밤잠을 설치셨다고 한다. 어두운 하늘에서 돌이 날아와 바위를 쓰러뜨린다 해도 흔들리지 않으실 강한 의지로 우리를 지키셨다고 하시니 대단하신 분이다.
가끔 엄하나 조용하신 목소리는 어느 날 우리 몸속에 흔들리지 않을 기둥을 하나씩 박아 주셨다. 때로 생활이 힘들어 회한이 가슴을 치더라도 인내와 지혜로 이겨 나가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씀 하시던 엄마. 그런데 나는 지금 그것의 반의 반에도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잘못함도 경험이라며 격려해 주시는 목소리, 이제는 늙고 병들어 한국에 계신데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 죄송함을 어찌하랴.
엄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지난 일들이 생각나며 줄줄이 통곡이 배어 있는 잔잔한 외로움이 가슴에 깊이 박혀 다가온다. 딸들은 ‘유리 항아리’라면서 멍이들까 깨져서 금이라도 날까 조심스러워 하시던 엄마. 지금은 그 모두가 그립고 행복한 순간들이다.
아무리 여자라도 세상이 바뀌었으니 꿈을 높게 가지라 하시고 그래도 먼저 주위를 돌아다보고 스스로의 능력을 재어보고 실현 가능성이 있나 없나 보고 또 보고 판단하고 설계하라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구름 잡듯 허황하고 찬란한 꿈이 어느 날 텅 빈 껍질의 신기루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이렇게 정열과 노력으로 본인의 꿈을 이룬다면 삶은 더 탄력이 있고 기쁨은 두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때 삶의 자만심은 절대 금물이며 이는 바로 멸망을 의미하니 그저 긴 겨울 지나 새싹 돋는 날을 생각하며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쩌다 힘든 시기가 다가오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며 세상만사를 그저 물 흐르는 데로 배를 저어가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참, 결혼에 대해서도 얘기하셨다. 사람들은 결혼이 마술에 취해 욕심과 기대로 만들어 진다고 얘기하지만, 그런데 야속하게도 이때 사랑 말고도 부부싸움이라는 선물을 함께 하느님에게서 받아온단다. 어떤 이들은 사랑과 환상이 계속 뒤바뀐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생활과 환상에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고속버스에 올라 아름다운 꽃들과 풍경들을 바라만 보는 것이 환상이라면, 고속버스에서 내려 자갈길을 맨발로 걷다가 개울도 건너고 숲을 지나 낯선 골목을 돌아서 무사히 어느 불빛 새어나오는 그 집에 갈 수 있는 것은 생활이다. 환상은 달고 생활은 고달파도 환상은 왔다 사라지지만 생활은 알찬 열매를 딸 수가 있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자기 마음속에 용해시킬 수 있다면 또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쉽게 풀리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과 더불어 사는 인생처럼 값진 삶이 없단다. 주위에 사랑의 담을 높게 쌓고 바다에 물 한 바가지 더 부어도 끄덕도 안하듯 튼튼한 너의 바람벽 뚝을 쌓아 가려므나. 그리고 잊지 말아라. 결혼 서약서는 싸움터에서 작성한 상호 침략 조약이 아니라고 엄마는 말씀 하셨다.
이제는 늙으신 우리 엄마 목이 내려앉고 몸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으신데 자주 가서 뵙지도 못하고, 어쩌나 어느새 엄마의 인생관과 결혼관이 나의 것이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다. 무너져 버린 엄마의 나무껍질 같은 손을 멀리서 가만히 잡아본다. 나는 갑자기 겨자 소스를 몰래 찍어 먹은 사람처럼 코끝이 찡해지며 울컥 눈물이 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