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때 예수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 21-22)” 고 대답하셨다.
참으로 가혹한 요구를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 그 자체가 곤욕스러운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십자가’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 십자가는 죽음이었다. 죽을 각오가 아니면 제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의 의미를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그냥 따라온 것이다. 예수를 믿고, 또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충성해서 죽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은 사랑의 책이다. 그 사랑이 무엇이냐를 딱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 8)”라고 이미 정의를 내렸기 때문이다. 사랑은 깨닫기도 어렵고 행하기도 어렵다. 하나님을 우리가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은 늘 우리에게 사랑의 도전을 주고 있다. 그 많은 말씀 중에 우리의 가슴을 늘 서리게 하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태복음 5: 39)”의 말씀이다.
구약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말씀했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말씀하셨다. 바로 그 법이 타면자건(唾面自乾)법이다. 물론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셨지만 오른편 뺨을 맞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천하의 사랑의 도를 실천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부교역자로 섬기던 시절 담임 목사님께서 교역자들과 더불어 둘러 앉아 있을 때 가끔씩 잊을 때마다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그 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 담임 목사님의 속이 얼마나 상하셨으면 그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마음에 동병상련이 꿈틀거린다. “누가 오른편 뺨에 침을 뱉거든 오른 손으로 씻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라고 하시면서 “무인불승(無忍不勝)”을 되뇌곤 하셨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실 때 결코 대신 욕하지 않으셨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어도 대신 침 뱉지 아니하셨다. 얼굴에 뱉어진 침이 천천히 마르도록 기다리셨다. 그것이 타면자건(唾面自乾)의 도리이다.
어떤 일이든지 내 마음의 생각과 뜻을 성급히 이루려고 하면 은혜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것이 은혜가 아니고 행위가 된다.
행위는 구원받을 수 없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사랑도 은혜 가운데 나오는 것이지, 나의 행위로 사랑을 표현하면 오래가지 못한다. 조미료로 음식의 맛을 내려고 하면 며칠은 갈 수 있다. 그러나 장맛이 담긴 음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요즈음은 너무 인스턴트가 많이 있다. 신앙도, 사랑도, 그리고 교회도 그렇다. 좀 더 구수하고, 느긋하고, 좀 더 무거운 그런 모습들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왔으면 좋겠다.
김범수 목사
워싱턴 동산교회,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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