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세월에 나이태가 쌓이면 그 만큼 늙어지게 되고 이에 따라 옛 추억도 그립고 자주 생각나게끔 된다. 그 추억의 하나는 단지 소박하고 정겨웠던 그리고 한국의 투박하고 고유한 맛이 고스란히 담겨진 친구 어머니의 밑반찬 추억이다.
그 맛의 향기가 바람에 날리듯 지금도 내 코를 벌렁거리게 하고 있다. 손수 만든 음식을 나에게 먹여 주시기도 했던 추억속의 밑반찬, 그 내음의 맛이 나를 그때 그 속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맛있는 그 맛, 결코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밥상에서 밑반찬을 볼 때면 그 어머니의 손맛과 함께 추억 어린 시절로 나를 되돌아가게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 친구의 집은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었고, 그 집 바깥채는 상가로 반 이상이 둘러싸여 있었다. 안채는 살림집으로 꽤 큰 집으로 기억된다. 그 집에서 세 들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가면 “병찬 학생” 혹은 “총각”으로 불렀던 때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잊지 않고 친구 어머니를 자주 뵈러 갔었다. 나를 아들처럼 여겨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 때 당시 친구 형님이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고 얼마 후 한국에 와서 결혼한 후 미국에서 터전을 잡았다. 미국에 터를 잡으신 이래 매월 정기적으로 어머니 용돈으로 약 250~500달러 정도를 송금하셨다. 그 때가 1970년 중반쯤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내 친구 어머니는 한글도 한문도 아시지만, 큰 아들한테 송금을 받을 적마다 답장을 하시는데 그때는 꼭 나에게만 부탁을 하셔서 내가 어머니의 대필을 해드렸다.
막내 아들인 내 친구가 있는데도 내게 부탁을 하시는 게 난 그저 고맙고 마냥 좋았었다. 대필이 계기가 되어서 매월 찾아뵙고 그 대필 편지를 써 드리기 시작했었다. 비록 내 친구가 있어도, 그 친구는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늘 혼자 바쁜척만 했었다.
따끈따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 내가 좋아 하는 두부 넣고, 고추 넣고, 보글 보글 맛있게 끓던 된장찌개와 배추김치, 총각김치, 밑반찬으로 멸치조림, 무장아찌, 마늘장아찌, 콩자반, 어리굴젓, 명랑젓, 오징어젓 그리고 기름에 잰 김과 같은 반찬들을 갈 때마다 늘 해주셨다. 밑반찬 대부분이 몇 년씩 익힌 것이라 진짜로 맛 그 자체였다. 내 식성도 이미 잘 알고 계셨기에 그렇게 해 주신 것이었다. 내가 대필을 마지막으로 해 드린 것도 아마도 1995년 미국에 오기 얼마 전까지였다.
한 번은 내 친구 명의로 집 한 채를 살 때도 나를 대동 하신 다음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셔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에 찌게니 마늘장아찌, 무말랭이, 고추조림 등을 또 해주셨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아껴 주셨기에 나 역시 그 깊은 은혜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밑반찬을 어디서나 만날 때마다 그 때 그 당시 그 어머니의 손맛이 봄에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듯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맛이 혀끝에서 맴돌고 있다.
주님 곁에 가신 친구 어머니께 보석보다 귀한 추억을 일깨어 주셔서 감사하다. ‘사랑합니다’라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싶어진다. 이런 소중한 맛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난, 정말 행복한 사나이가 아닐 수 없다.
홍병찬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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