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주말이면 자연을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던 마음까지도 주춤해진다. 읽을 만한 책이 없을까 책꽂이를 살펴보다가 이민가방에 묻혀왔을 성 싶은 현진건의 문고판이 눈에 띄었다. 세월의 옷을 겹겹이 입고 누렇게 바랜 책을 꺼내드니 옛 문인이 성큼 걸어 나오는 듯싶다.
<빈처>는 현진건이 1921년에 발표한 자전적인 단편소설로 그에게 문명(文名)을 얻게 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가난한 작가지망생인 주인공이 부유한 명문가에서 시집 온 아내와 현실적 궁핍이라는 한계상황에서 작가로서의 이상가치를 추구하며 애틋한 사랑을 확인한다.
불황의 늪이 끝이 안 보인다. 아무리 정부가 나서서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아도 경기의 흐름은 마이동풍이다. 오랫동안 소비에 익숙하던 아내들이 살림 규모나 씀씀이를 줄여보려 하지만 여전히 불확실한 내일을 걱정하며 빈처임을 자처한다.
끼니를 위해 자잘한 살림도구와 옷가지마저 처분해야 했던 소설속의 여인과 우리사이에는 한 세기 가까운 격세가 있다. 어렵다고 한숨짓는 요즈음의 아내들은 다이어트를 위해 칼로리 섭취를 줄이려 애쓰면서도 두세 블록 거리 마켓까지도 차를 타고 간다.
미국에서 쓰레기로 버려지는 음식만으로도 웬만한 나라의 굶주리는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다니 우리는 풍요 속에 빈곤을 느끼며 살고 있는 셈이다.
물질만능주의가 시대정신으로 판치는 세태에 살자면 빈곤은 분명 고통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정서적인 기근 역시 참기 어려운 허기의 원임임을 세월이 흐를수록 통감하게 된다.
“나이가 들고 지혜가 깊어질수록 정신적인 삶을 최고로 여기는 법이다.”라고 톨스토이는 말했다. 그러고 보면 물질적인 궁핍보다는 정신적 결핍을 망각하고 사는 아내들이야 말로 진짜 빈처가 아닐까싶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책 읽는 여인> 마르고(Margot)는 비록 화류계의 여인이지만 창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부드러운 역광 속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행복감에 젖어있다. 책에서 반사되는 빛을 받아 빛나는 여인의 얼굴에서는 생명력이 넘친다.
어느 잣대를 쓰느냐에 따라 나도 빈처 중에 한 사람일 것이다.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경기침체에 물질적인 어려움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이럴 때일수록 책을 읽고 사색하면서 정신적 빈처에서 탈출하여 참 행복과 삶의 역동성도 회복해야 하지 않겠나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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