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주말이면 아침 일찍 아버지와 함께 남동생 손을 잡고 작은 베낭에 삶은 계란과 귤, 새우깡 등 간식을 챙겨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지금은 없어진 ‘비둘기호’라는 완행열차를 타고 목적지가 없는 당일 여행을 다녔었다.
비위가 약했던 나는 바닷가 시골 간이역을 다니던 열차에서 나는 비릿하고 짠 냄새가 싫어 아버지가 깔아 주신 작은 손수건 위에 그림같이 앉아 행여 냄새가 몸에 닿을까 불안했던 기억이 난다. 붙임성이 좋은 동생은 앞자리 할머니가 쥐어준 고구마나 옥수수를 잘도 받아 먹었다. 주변승객이 여러번 바뀌고우리는 낯선 시골역에 내렸다. 논두렁길을 뒤뚱뒤뚱 걷기도 하고 늦가을 고추 잠자리를 이리저리 쫒기도 하다가 뭉텅이로 핀 코스모스 군락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오후 나절을 보냈다. 누구를 만나러 간 것도 누가 기다리지도 않는그런 여행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첩을 펼치면 아버지의 파란 점퍼에 묻은 바람 냄새가 아련히 맡아지는 것 같다.
그 사진첩 속에 엄마의 부재를 안 것은 얼마 전이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미당 서정주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평생 글을 써온 올깍이 작가이시다. 마감일이 가까워지면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엄마가 가능하면 편안하게 그리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글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외출을하셨던 것이다.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고 어슴프레한 저녁이 되어 집에 도착하면 말갛게 웃는 얼굴로 엄마는 우리를 맞아 주셨다. 미안해 하는 엄마의 표정과 푸르스름하게 자라 까칠한 아빠의 수염의 느낌이 지금도 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몇년 전 한국일보에 1년가량 기고를 했었다. 고작 한 달에 한 번 글을 내는 데도 받는엄청난 스트레스와 내 초라한 글솜씨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지난 달 ‘여성의 창’에 권유를 받고 며칠을 망설였다. 예쁜 글을 쓰려 하지 말고 진솔한 생활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면 자연스럽게 글이 나올거라는 엄마의 격려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본다.
(상항한국학교 교사)
=============================================================
천경주씨는 남편, 딸과 함께 이스트베이 지역에 살고 있다. 상항한국학교에서 12년째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