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내 속에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가 대학 4학년 때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씨가 ‘숲’이라는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처음 듣게 되었다. 이후로 세월이 지났지만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후 시간이 꽤 지나서 누군가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면서 더이상 소수의 가시나무로 있어 주진 않았다. 그들에게 ‘당신’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교감하기에 충분한 노랫말이고 충분히 쓸쓸해지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좋아하고야마는 듯하다. 이들이 내가 느끼는 똑같은 감정으로 그 노래를 감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가시나무라는 노래는 고백이고 위로이고 항복이다.
하덕규씨의 버전으로 듣는 가시나무는 아름답다. 그리고 슬프다. 섬세하면서도 아픔이 느껴지는 탁월한 단어 선택, 인간인 우리의 한계를 느낄 수 있는 고백 그리고 영혼에 대한 갈망이 애절하게 전해지는 매력 있는 편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로 향한 부끄러운 고백의 편지 같은 것. 나의 못남이 나의 삐뚤어짐이, 나의 고집이, 나의 변덕스러움이, 삭막함이, 모난 성격이, 허다한 욕망이 나를 향해 꿈꾸고 계시는 그 분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내가 어쩔 수 없는 나의 모습을 죄송하게 생각하며 나를 지으신 원래의 목적을 알고 변화되기 위해 회복을 꿈꾸는 나의 기도와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는 이 노래를, 이 편지를 모두가 공감하고 아픈 마음 그리고 내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 분께 이제 맡겨야 함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부르고 듣고 한다면 그 노래의 원래 지어짐의 의미를 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시나무를 처음 만나고 2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는 요즘 나는 또 다른 새로운 마음으로 가시나무를 노래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그리고 꿈꾼다. 20년 후에는 목적을 향해 벌써 많이 달려 가 있는 나의 모습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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