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치고 잿빛 하늘이 걷히었다. 투명한 공기의 파장을 일으키며 거침없이 쏟아지는 햇빛은 올해 마지막으로 만개한 12월의 장미꽃과 나무와 지붕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가장자리에 노란 색을 머금어 화사하고 풍요롭다. 조락의 계절이라는 말은 LA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던 때라면 벌써 집을 떠났을 것이다. 비 갠 후 화창한 날은 아케디아 식물원이 산책하기에 좋다. 청명한 공기와 따뜻하게 퍼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반기는 나무와 꽃들의 모습을 대한다면 오솔길을 걷는 나도 덩달아 행복해질 것 같아서이다. 명패를 달고 있는 식물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고 싶다. 그런데 미적거리고 있다. 비즈니스를 정리하고 일을 줄인 지금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형편이 되니 실행력이 오히려 떨어진다.
집안일만 해도 그렇다. 급하게 하지 않아도 되니 하는 일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한없이 나태해지고 생동감도 사라졌다. 이제는 집안을 반짝반짝 빛나게 정리하며 살아야지 했는데 바빴던 이전이나 한가한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다른 것은 감히 바라지 못해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주어진다면 혼자서 얼마든지 행복감에 젖어 살 것으로 생각했다. 하다못해 집주변이라도 뱅뱅 돌아다닐 그런 계획을 품고 살아왔다. 현실은 산보는커녕 집안에 틀어박혀 어느새 어둑해진 저녁을 맞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허투루 써버린 시간들이 아쉬워 오히려 우울해진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미래와 직접 부딪친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여지없이 실감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유로운 시간에 대한 꿈은 헛된 환상이었다.
이처럼 세상의 일은 어긋나기 일쑤다. 사랑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나에게 무심했다. 전혀 생각 없이 한 행동에 대해 고맙다고 두고두고 말하며 내가 힘들 때 위로를 아끼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관심과 사랑을 많이 쏟았다고 생각한 자녀가 가정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외로웠다는 심정을 토로할 때가 있다. 세상은 나의 생각과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깨우친다.
부모들이 모이면 아이들이 부모 말을 건성으로 들을 뿐 아니라 부모에 대한 공경이 없고, 커갈수록 대화가 줄어든다는 하소연 한다. 스마트폰 시대로 바뀌어 행동패턴이 달라졌다. 부모가 예전 방식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자녀들이 원하는 것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자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그들의 입장에서 듣고 도와줄 자세를 견지한다면 파국은 면할 것이다.
말로 일일이 꺼내놓을 수 없는 자녀들의 속사정을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살필 줄도 알아야한다. 부모가 앞 뒤 가리지 않고 잔소리 조의 훈계만 늘어놓으면 유대감만 깨어진다. 부모 자식 간에 오히려 껄끄러움과 미움이라는 앙금만 남게 된다.
막말로 윽박지르고 떼쓰고 남의 험담을 늘어놓아 불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런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인내심과 지혜도 필요하다. 사람은 정연한 논리의 훈계나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고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훈계보다 이를 덮어준 배려에 대한 고마움으로 잘못을 고쳐가는 경우가 더 많다.
요즈음 레미제라블이 뮤지컬로 영화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아마 그 한 가지를 우리에게 일깨우기 때문일 것이다. 쉬운 듯하지만 도저히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이웃 사랑과 관용을 가르치려고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야 했다. 오늘처럼 햇살이 시궁창으로도 스며들어 따뜻한 기운으로 어루만지는 것과 같은 이치리라.
세계의 경제 패러다임이 급속히 바뀌었다.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만족스런 일자리도 없다. 레미제라블 소설 속에서처럼 민중혁명의 불길이 타오를 것만 같은 불안한 나날이다. 이처럼 예민한 시기에는 특히 가족 간의 화목과 이웃에 대한 너그러움이 필요할 것 같다.
비 개인 화창한 날 집안에 앉아서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햇살이 퍼지는 모습을 보다보니 이런 생각이 찾아와 또 나의 일손을 멈추게 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