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맞아 서울의 형과 전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소설가 X가 화제에 올랐다.
“네 동창이라더니, 너를 모른다고 한 마디로 딱 잘라버리던데.”
얼마 전 서울에서 열린 X의 특별 강연에 참석했다가 강연 뒤 그와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네 이름을 대고 동생이라고 했다가 참 민망해서 혼났다.”
X의 애독자이자 열렬한 팬이기도 한 형은 더 이상 말붙일 빌미조차 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듯 했다.
그는 한국의 저명한 소설가이다. 나는 그가 나를 모른다고 말한 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수많은 고교 동창 가운데 하나인 나를 70년대 초에 잠시 쌓은 일천한 인연만으로는 기억해 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움터 오르는 섭섭한 감정을 지울 수는 없었다.
70년대 초 내가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던 서울의 한 신문사 편집국에서 X를 만났다. 고교 졸업 후 10여년 만이었다. 당시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문인들이 글을 써서 먹고 살기가 그리 녹록치 않던 시절, X는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에 중편 소설 연재 계약을 맺었다.
자연히 그와의 접촉이 잦아졌다. X는 가끔 문화부에 모습을 나타냈고 문화부에 고교 동창이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심 다행스레 여기는 눈치였다. 내가 도움을 줄지언정 해를 입히지 않을 존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문화부장은 그가 나와 동창이라는 이유로 종종 그와의 연락업무를 맡겼다. 원고 독촉도 하게 했고 원고료 전달도 부탁했다. 복더위가 한창이던 여름날 원고료를 전해주고 보신탕을 대접받은 기억도 있다. 그가 잠시 국외에 체류하며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몇몇 친구들과 어울러 회식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신간 소설을 선물로 받았다.
아득해진 그와의 인연을 잠시 회상하다 보니 섭섭한 마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인기를 타고 한껏 위상이 높아진 X가 번거롭고 하찮은 인연들을 가지 치듯 잘라내며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설사 너를 생판 모른다하더라도 ‘아, 그러시냐’ 고 한마디 해주고 넘어가면 제 명예나 지위가 땅에 떨어지기라도 하냐? 지위가 높아지면 사람이 오만해져서 대화가 막혀버려.”
대기업의 중역으로 은퇴한 형은 명예, 권력, 재력 등 가진 자의 오만을 질타하고 가진 자와의 소통 부재의 원인을 오만에서 찾았다. 나는 X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적극 그를 두둔했지만 형의 생각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형과 대화를 나누다 기독교의 큰 화두인 ‘낮아짐’을 떠올렸다. ‘낮아짐’은 가진 것을 내려놓고 겸손을 실천하는 헌신적 행위이다. 낮아짐은 높이 오른 자의 의무이다.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프랑스어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도 ‘낮아지라’라는 주문이 아닐까 한다.
무엇을 내려놓고 낮아질 것인가? 내려놓을 대상은 권력, 명예 혹은 재력 자체보다도 그 안에 둥지를 틀고 자라나는 오만한 마음이다. 낮아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올라갈 필요는 없다. 너도 나도 갖고 있는 자존심만 조금 내려놓아도 세상은 밝아질 터이니까.
겸손만큼 큰 미덕은 없다. 특히 가진 자의 겸손은 사람을 쉽사리 감동시킨다. 아프리카 수단을 찾아가 의사로서 낮아짐을 실천하다 떠난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 생애를 세상 사람들은 얼마나 흠모하고 칭송하는가.
크리스마스 덕분에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쉬며 즐기면서도 그 의미를 잊은 채 맞고 보내는 연말이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낮아짐의 달인이요, 화신이다. 한번 낮아져 보자. 세상이 그대를 높여주고 존경할 것임에 틀림없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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