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그림 그 사람?”“그래, 기억나지? 어제가 생일이었다는데 무슨 운명인지 자기가 세상에 온 날 세상을 떠났다지 뭐야. 졸렵다고 눕더니 정말 잠자듯 떠났대. 우리 교회 교인이어서 잘 알지. 참 착한 분이었는데 너무 안타까워”오랜만에 안부전화를 걸어온 옛 직장동료 S가 긴 수다 끝에 툭 던지듯 그녀의 부고를 전했다.
전화를 끊고 검은 구름이 짙어지는 창밖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곧 비가 오려나봐. 마음어딘가마른 바람이 허허롭게 일렁였다. 허기처럼 무엇으로라도 속을 채우고 싶어졌다. 냉장고에 며칠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박을 꺼냈다. 칼집을 넣고 힘을 주어 반으로 가르는 순간“, 쩌억~” 제 스스로 먼저 몸을 여는 소리. 잘익었겠다는 생각보다 너무 익어 곯았겠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슨 경품추첨에서 꽝이라고 적힌 공을 연기분이었다. 검붉게 곯은 부분을 동그랗게 파내 한 입 베어물었다. 퍼석한 식감에 인상을 찌뿌리면서도 무슨 심사인지 뱉지 않고 억지로삼켰다. 어쩌면 요즘의 내가 사는 모양새가 겉만 멀쩡해보일 뿐 정작 속은 곯아버린 수박을닮았구나,한숨을 내쉬면서.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창 밖 나무에앉아있던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비가 올때 새들은 어디에서 비를 피할까? 싱거운 굼금증을 품는 사이 심장이 또 빠르게 요동쳤다.
요즘 수시로 찾아오는 증세다. 진정시키듯 오른 손을 심장부위에 얹고 잠시 눈을 감아본다.
나 여기 살아있다는 외침처럼 거친 두근거림.
너 괜찮은 거니? 내가 나에게 물어보다 감겨진눈 속 깊은 기억 너머 한 여자의 웃는 얼굴을떠올렸다. 어제 죽었다는 그 여자, 살아있음이참 행복하다던 그 사람.
“요즘은 아침에 잠깐씩 달리기를 해요. 숨차게 뛰고 난 후 심장이 터질것처럼 두근거리는그 느낌이 좋아서요. 내가 오늘 아직 살아있다는 그 기분이 얼마나 근사한지 알아요?”그날은 공기마저 투명한 것처럼 유난히 햇살이 맑은 봄날이었다. 지역 한인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던 나는 한인사회 화제의 인물코너인터뷰차 그녀와 처음 만났다. 주로 나무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것외엔 내가 아는 건 그녀가 말기암환자라는 거였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그날 나는 화가인 그녀보다 암환자인 그녀가 더 흥미로웠다. 사악한 호기심처럼 말기암환자인 그녀 속에 숨겨진 인생의 비애를 훔쳐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어쩌면 나는 그날. 하지만 그런 삐뚤어진 호기심을 단숨에 날려버린 그녀의 통괘한 한 방은 바로 그 말이었다.
“아. 정말 행복해죽겠어요! 인생이 참 아릅답다는걸 요즘 매일 매 순간 느껴요.”그 순간의 그녀는 정말 아무 흠집 하나 없이 온전히 행복해보였다. 인터뷰 내내 유난히많이 웃고, 밝고, 활기차서 이 사람이 정말 암환자가 맞나 의아할 정도였다. 쉬흔살이 넘은여자의 열일곱살 소녀같은 폭풍수다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머리에 쓴 두건 아래로 내려뜨려져 있는 양갈래 땋은 머리조차 나이를 잊게할 만큼 제법 잘 어울려보였다.
“항암치료를 자꾸 받다보니 머리가 휑해져서 두건을 썼는데 뭔가 심심하잖아요. 그래서두건 속에다 아예 가짜 머리를 붙여서 땋았어요. 아프기 전엔 항상 내 나이답게 살았는데이상하게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요즘은 철없이 마음대로 하고 살아요. 좀우스워보이죠?”“아니요. 정말 잘 어울려요.소녀처럼요.”소녀 같다는 말에 그녀는 양갈래로 늘어진머리꼬리를 양 손으로 잡고 흔들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런데 궁금해요. 왜 항상 나무만 그리세요?”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무만 눈에 들어와서요. 다른 걸 좀 그려봐야지, 하다가도 어제와 또 다른 나무의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리게 되거든요. 그거알아요? 나무에게도 열굴이 있고 표정이 있고뒷모습이 있어요. 거기다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나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다른생각을 못 할 정도라니까요“.
나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그녀의 이름은희목. 기쁜 나무. 자신은 운명처럼 나무그림화가가 될 팔자였다며 그녀가 웃었다.
“아버지가 지어주셨대요. 난 얼굴도 기억 못해요. 내가 태어나서 돌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내게 남은 유일한 아버지의선물이 내 이름인 셈이죠. 다들 처음 들으면여자 이름이 이상하다고 하겠지만 한번 들으면 기억에 오래 남는 이름이라 좋아요. 아마 이기자님도 내 이름은 잊지 않을 걸요. 희목. 기쁜 나무.”그녀의 말처럼 그 이름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마음의 눈이 떠져 나무의 얼굴이 보이거나마음의 귀가 열려 나무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가끔 나무를 보면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곤 했다. 인터뷰차 만난 두시간과 기사가 나간 후 전화로 기사 잘 봤다며 고마웠다는 얘기를 나눈 통화가 전부였던 만남이지만 깊은인상을 남겼던 그녀. 말기암으로 투병중이면서도 행복해죽겠다던 그녀는 아마도 생의 끝날까지도 그 마음을 품고 행복하게 눈을 감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날, 인터뷰를마치고 배웅하던 그녀의 차 뒷유리창에 붙어있던 작은 스티커 속“ Life si good!” 이라는 문구처럼 그녀의 인생은 정말 아름답고 좋기만했을까?“사는게 지겨워! 아주 지긋지긋해! 뭘 받아들이라는거야, 어떻게 편안해지라는거야!”그녀가 잠자 듯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는어젯밤, 나는 사는게 지겹다며 애궂은 남편의속을 아프게 할퀴었다. 아무 대꾸 없이 벽을향해 돌아누운 남편의 등을 향해 푸념을 쏟아내다 괜히 제 설움에 겨워 한참을 흐느끼다잠이 들었다. 잠결에 눈가를 닦아주는 남편의손길을 느꼈고,꿈결처럼 중얼거리는 남편의 음성을 들었다.
“알아, 네 마음 다 알아. 미안해. 힘든 거 다 알아.”올해로 미국에 와서 산지 벌써 10년째. 낯선곳에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행복한 날보다 괜히 화가 나고,뭔가 억울하고, 하염없이 슬프고, 지독히 쓸쓸한 날이 더 많았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고달픈 신세한탄이 주기적으로 깊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과거와현재를 비교하며 우울해지곤 했다. 한국에서는 하얀 와이셔츠에 매일 다른 색깔의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편이 편한 작업복 바지에땀에 절은 티셔츠차림으로 지쳐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 한국에서 나름 잘 나가던 내가 이 곳의 영세한 한인신문사에서 기자라는 허울 좋은 이름 뿐 광고 몇 개라도 더 따려고 한인타운의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 때. 먹고 사는 고달픔이 서글픈 게 아니라 폼나게 먹고 살 수 없다는 자격지심에 초라해질 때마다 수시로 서글픈 자기연민에 빠지곤 했다. 몸이 아플 때도,말이 잘 안 통해 억울하거나 답답할때도 그리고 시시때때로 수많은 상황과 장소에서나는 초대 받지 못한 손님처럼 불안하고 어색한표정과 몸짓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이방인 이민자였다. 그 모든 이유가 결국 나 자신의 부족함임을 알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나는 더 기를 쓰고 탓할 거리를 찾았다. 남의 나라에서 자리잡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죽어라 노력해도왜 겨우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지에 대해 늘 넘치는 핑계거리로 나를 변명했다. 그런 나의 비겁함이 가끔 부끄러웠고 그럴수록 나는 가면 위에 또하나의 가면을 쓴 사람처럼 나를 숨기고 살아왔다.
꿈,한국을 떠나오며 가슴에 품고왔을 그 말은세월 속에 지워져가고 있었다. 어느날 보니 그저나는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별로 다를 게 없는 날들이 흘러왔다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기쁨이자 희망이라면 바로 유진. 이 곳에 올 때 열살이었던 그 아이는 어느새 대학생이되었다. 내 어깨 아래였던 키는 나를 훌쩍 넘어섰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 학교에 가기 싫다며 아침마다 울던 아이는 이제 나를 대신해 영어가 필요할 때 알아서 척척 해결해주는 나의 언어보호자가 되었다. 예쁘고,착하고,공부 잘 하는 딸. 게다가 장학금 받고 좋은 대학까지 가줬으니 아이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단 한번의 이탈도 그흔한 사춘기 반항조차 없던 늘 고맙고 착한 딸.
엄마 아빠가 고생하는게 안스럽다며 자기가 대학졸업하고 돈 벌면 꼭 호강 시켜주겠다는 약속으로 지친 우리를 위로하고 웃게하는 딸, 내 인생의가장 큰 희망.
그러나 인생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속을 걷는 일. 내 인생의 자랑거리인 그 아이가내 심장에 비수를 꽂을 줄은 상상도,정말 상상도못 했다. 한 달여 전 그날까지만 해도.
“엄마!”깊은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은 참 이상한 시간이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도,흔들어 깨우는누군가의 손길도 불안하고 불길한 예감으로 이어지니까. 그밤도 그랬다.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꿈결인 듯 두번쯤 듣다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서 있는딸아이를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어떤 직감처럼 나를 소스라치게 놀래킬 무슨 일이벌어졌다는 걸 심장이 먼저 알아챘을까?“엄마.…”몸을 일으켜 앉자 딸은 나를 한번 더 부르고 잠시아무 말이 없었다. 그 짧은 침묵이 더 불안했다.
“왜? 무슨.… 일.… 있어?”놀란 내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졌다. 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알수 없는 표정으로 내 눈을 쳐다보고 서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왜?”깊은 잠에 빠진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내려가는 사이, 얼음물에 세수한 것처럼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놀라지마, 엄마.”놀라지 말라는 말보다 무서운 말이 세상에 있을까?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엄마, 나… 엄마가 될거야. 아기를 가졌어.”엄마, 나, 엄마, 아기… 세상에 나와 처음 듣는단어들처럼 의미조합이 안 되는 말에 그저 머릿속이 멍해졌다.
“미안해, 엄마”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어둠 속에서 나를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아기는.… 지금…”“알았어. 알았으니까 지금은 가서 자.”“엄마 내 말 들었어? 내가 임신을…”“들었어. 알아. 내일 말해.”눈물 많고 쉽게 흥분 잘 하는 내가 이런 엄청난 상황에서 침착하고 이성적이라는게 나 자신도이상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니까 오히려 머릿속이 마비된 것처럼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어떤 말을 더 물어볼 수도 더 자세히 들을 자신도없었다.
“아침에 얘기하자. 가서 자.”겨우 그 말을 하고 다시 자리에 누워 등을 돌렸다. 미동도 없이 한참을 서있던 딸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그제서야 눈물이 솟구쳤다. 말.도.안.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잖아!겨우 대학 1학년을 마친 여름방학, 스무번째 생일도 지나지 않은 딸아이의 갑작스러운 임신소식은 남편과 나의 혼을 빼놓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흐릿한 얼굴로 며칠동안 우리는 아무 말 없이밥을 먹고 아무 말 없이 TV를 멍하니 보다 아무말 없이 잠이 들었다. 등을 돌린 채 누워 서로의뒤척임을 밤새 느꼈다. 푸석한 얼굴로 남편이 출근을 하면 침대에 누운 채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들으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건 그저 나쁜꿈일거야! 차라리 온종일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한인신문사는 영세한 재정과 경영난에 시달리다 문을 닫았고 나는 임시실직상태였다. 그나마 그게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있어서 다행이었다. 몸과 정신이 마비된 듯 매일멍한 상태로 넋이 나가있었다.
딸의 뱃속에 있는 아기아빠가 누군지 알고난후 내가 한 말은 이 한 마디였다“. 미쳤구나!”학교 옆 자주 가던 작은 샌드위차샵에서 일하는 서른살의 백인남자. 그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알 필요도 없었다. 아이를 낳을 거라는말에 그럴 거면 차라리 인연 끊자고, 넌 내 딸도아니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럼 엄마는.… 엄마는 이 애를...어떻게 하길바라는데… 그건… 안되잖아… 난 못 해… 내 아기야!”본능적으로 배를 감싸안으며 붉어진 눈으로 날쏘아보던 딸의 단호한 목소리가 순간 섬찟했다.
착하고 예쁜 내 새끼,내 인생의 보물이던 내 딸,그아이가 아니라 낯선 여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엄마 말 안 들은 적 한번도 없었어.
낯선 나라 와서 고생하는 엄마 아빠 보면서 나라도 기쁨이 되어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그러니까 엄마 이번 한번만 나 이해해줘. 엄마 마음에 안 들어도 제발 부탁해. 이건 내 인생이잖아! 난 이제 어린아이가 아냐. 내가 행복하면 되는거 아냐? 난 지금 정말 행복해. 그러니 그냥 이 현실을 좀 받아들여주면 안 돼? 힘들겠지만 엄마도노력해봐. 제발 날 이해해줘!”아무리 울고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마음을바꿔보려고 해도 이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이 나를 배신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속이라도 썩이던 애였으면,너무 기대하지 않게 가끔 실망이라도 한번씩 시켰던 적이 있더라면,어떻게 저런 애를 내 딸로 주셨냐고 황송한 감사의 기도가 나오게끔 자랑스럽던 아이가 아니었더라면,그랬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의틈새가 조금이라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일주일쯤 후부터 현실을 인정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 남편과 달리 벌써 한 달이 넘게 나는 딸과 말한마디 나누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날부터 나는 죽은 여자처럼 살고 있다. 숨만 쉬고 있을 뿐.
“병원에서 그랬다는데 아들이래,”중간에서 소식을 전해주는 건 남편이었다.
“검사했는데 아기 건강이 조금 염려스러운 데가있어서 스페셜 닥터를 만나 다시 검사 받아야 한대”물론 대꾸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남편은 의무적으로 브리핑하듯 딸과 뱃속의 아기 상태를 전해주곤 했다.
“기형아 증세 징후일 수 있다고 해서, 아니 꼭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검사를 다시 했나봐. 며칠 내로 결과 알려준다고 했대”그 말을 듣자 속으론 사실 덜컥 걱정이 되었다.
밤새 이런 저련 생각에 뒤척이느라 잠을 이루지못했다. 이런 상황에 더구나 건강하지도 않은 아이라면? 오,맙소사! 도대체 어느 벼랑끝으로 몰아부칠 작정인건냐구요! 대상도 모를 원망스러움이자꾸 치밀어 가슴 속이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그 즈음 나는 얼음을 입에 물고 살았다.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 가서 얼음을 꺼내 바드득 바드득 소리를 내며 깨물어 먹어야 가슴 속의불길을 겨우 식힐 수 있었다. 밖에 나가는 것도 누구를 만나는 것도 뭘 하는 것도 다 싫었다. 혼자 집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마음이 지옥의 불길 속처럼끓어오르는 여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즈음의 나는.
‘아,그게 어디 있더라?’한밤중에 귀신 같은 몰골로 앉아 얼음을 으드득거리며 깨물어 먹다 불현듯 생각이 나서 찾기시작한 건 기자로 일할 때 쓰던 USB였다. 인터뷰용 녹음기에서 파일을 USB에 옮겨 저장해놓았던 것중에 나무그림화가,그녀의 인터뷰 녹음이 혹시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걸 찾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알 수없는 어떤 이끌림처럼 그 녹음파일을 떠올렸고갑자기 그걸 다시 들어보고 싶어졌을 뿐이다. 전에 쓰던 몇 개의 USB를 꽂아서 확인한 후에야 다행히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겨우 찾아냈다.
선명한 빛깔로 기억이 난다. 그날,그녀는 파스텔톤의 연두빛 가디건에 노란색 잔 꽃무늬가 예쁜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화사한 봄빛이 기분 좋게싱그러운 봄날 오후였다. 죽음의 그림자 짙은 말기암환자의 무채색 분위기를 상상했던 나의 선입감을 단숨에 날려버린 그녀의 봄빛같은 옷색깔이지금도 눈에 선하다. 녹음파일 속 그녀의 목소리도 봄빛을 닮은 웃음소리로 시작되고 있었다.
“요즘은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속으로 내게이렇게 말하죠.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죽어도 여한 없이 행복한 하루를 한번 살아보자,희목! 그러고나면 그 순간부터 행복한 마법이 시작되는 거예요.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그 향이 너무 좋아서 행복하고, 사과 한 개를 먹으면서도 그 새콤달콤한 맛에 행복하고,창문 너머 하늘을 보면서도 황홀하게 행복하고, 거을 속의 창백한 내 얼굴조차 예뻐보여서 내가 나한테 미소를지으며 예쁘다 예쁘다 그래요. 온종일 좋다, 행복하다 이 말을 수십 번도 더 해요. 이상하죠? 죽음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니까 삶의 손을 더 꼬옥 잡게 되더라구요. 사는게 지겹다고, 살기 싫다는 푸념을 수도 없이 하며 살아온 세월동안 느껴본 적 없는 무한행복 무한감사 그런 것들이 가슴에 가득해요. 그래서 혼자 생각했죠. 아, 세상엔 나쁜 게 없구나. 병도 인생의 귀한 선물이구나. 아프지 않았으면깨닫지 못했을 것들을 요즘 하나씩 깨우치면서 정말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사실 난 평생을 나자신과싸우면서 살아왔거든요. 한번도 내가 나를 제대로사랑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죠. 그러니 좋은 아내좋은 엄마도 아니었을 거예요.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 주위 사람들을 제대로 사랑했을리가없어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린 욕심이나 집착이었을진 몰라도...기자님은 어때요?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왔어요? 후회없어요?”그때 내 대답은 그랬다. 글쎄요, 완벽한 인생은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고 전 별로 후회는 없어요. 가면위에 또 다른 가면을 쓴 나의너무 뻔한 정답같은 대답. 뒤늦게 나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그날의 거짓말이 진심으로 부끄러웠다.
초라해보이고 싶지 않아서 약해보이고 싶지 않아서 더 강한 척 항상 괜찮은 척 제법 잘 살아가고 있는 척 했던 못난 거짓말.
녹음파일의 중간 부분쯤을 아무 데나 더 들어보았다. 파일 속의 그녀가 자신의아들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내 고집에 진 아들녀석은 의대공부를하게 되었죠. 의사아들,그거 폼나잖아요. 미국에와서 나도 자식 이만큼 잘 키운 성공한 인생이라고 내세우고 싶은 욕심이었나봐요. 공부도 워낙잘했던 아이라 아무리 그림을 좋아해도 절대 그건 아니라고 극구 말렸어요. 사내녀석이 그림 그려서 뭐 해먹고 살거냐고 했으니 나도 어지간히속물엄마죠? 그런데 일년 전에 암이 발병하고 제일 먼저 후회된게 그거였어요. 얼마나 길게 살다가는게 인생이라고 평생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말렸나. 그래서 지금이라도 네 길을 가라고.
늦었지만 엄마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했죠. 그랬더니 이번엔 아들녀석이 그래요. 내 인생조차맘대로 하려는 엄마 원망했던거 미안하다고. 그런데 엄마가 아프면서 깨달았는데. 아픈 가족 보호자로 병원 가보니 의사가 따뜻한 말 한마디만 해줘도 고맙고 힘이 나더라면서 자기가 이 길을 가야할 의미를 찾았다고 하더군요. 난요,좋은 엄마아니었어요. 자식이 내 소유물인줄 알고 살았거든요. 걔 인생까지 내가 계획한대로 짜맞추며 그것만 정답이라고 고집스럽게 우겼어요. 널 위해서라고 억지로 떠민 것들,내 희생에 대한 보답이 이거냐고 화낸 것들,내 말 안 들으면 인생 망친다고 엄포 놓은 것들이 결국 다 못난 나 자신의 속풀이였던 거죠.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내 인생을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련함이 결국아이에게 내 무거운 욕심의 짐을 지게 한다는 걸뒤늦게서야 깨달았어요. 보상심리처럼 내 망가진인생을 다시 고쳐달라고,내 욕심을 채워달라고 어쩌면 내가 거꾸로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린 건지도몰라요. 지금은요,마음으로 무릎 꿇었어요. 미안하다,용서해라. 깨닫고 보니 엄마로서 내가 해줄 일은 그저 진심으로 그애의 인생을 응원해주는 것 뿐이었어요. 잘 해라,잘 할거야,항상 널 믿는다 하면서요. 아휴,이 얘기하다보니 괜히 울컥하네요. 돌아보면 시행착오 많은 인생이거든요. 그거 다 고치고 갈 시간이 허락될진 모르겠어요. 어쨌든 남은 날들이라도….”처음 보는 사람에게,그것도 인터뷰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속마음을 다 보여주었던 그녀.
그날 들은 말들이 그때는 그저 귀로 스쳐가더니 이제서야 가슴 깊숙히 파고들어와 내 아픈 곳을 사정 없이 후벼팠다.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져왔다. 쇼파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고개를파묻고 치밀어오르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짝 마른 입술을 침으로축이고 나자 목이 말랐다. 그 사이 컵안에 담겼던단단한 어름조각들이 녹아 얼음물이 되어 있었다. 차가운 눈물을 한 컵 마시듯 얼음이 녹은 찬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웠던 가슴 속 불길이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엄마를 많이 닮았네요.”웃는 얼굴이 순박해보이는 청년이었다. 이목구비는 다르지만 웃을 때 반달눈이 되는 표정이 그녀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사실은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대요. 그래서엄마가 가끔 싫어하셨죠.”“왜요?”“제 얼굴 볼 때마다 겹쳐보이는 아버지 얼굴이싫어서래요. 제가 어려서 두분이 이혼했거든요. 이혼의 이유와 과정이 아름답지 못했고 그 상처가깊은 엄마는 저를 데리고 훌쩍 미국으로 떠나왔죠. 아버지와 가까운 하늘 아래 살고 싶지 않다는이유였대요. 여기와서 참 고생 많이 하셨죠. 이름없는 화가였던 경력으로 돈 벌기 어려운 곳이잖아요. 작은 샌드위치샵 가게 시작하고 그 후 이것저것 장사하시다가 고생끝에 다행히 잘 되어서경제적인 여유도 조금씩 생겼죠. 다시 그림을 그릴 마음의 여유도 찾게 되어서 좋아하셨어요. 한참 지나 환갑이 되면 한국에서 개인전을 꼭 열고싶다는 꿈도 꾸셨죠. 하지만 뭐 결국 이렇게…”말을 잇지 못하는 청년의 물기 어린 음성이 안쓰러웠다.
“힘들죠? 그렇게 엄마 보내드리고… 요즘 많이마음이 힘든 때겠어요.”“그냥.…”말을 더 못 잇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청년의 옆모습이 어느 낯선 길에서 엄마를 잃고 억지로 울음을 참는 아이처럼 측은했다.
“전화로 말했던 거 이거요,그냥 지우기엔 너무아까워서 꼭 전해주고 싶었어요. 저 아는 분이마침 같은 교회라고 해서 연락처를 알 것 같아여쭤봤구요. 낯선 사람이 뭐 전해줄 게 있다는 전화를 해서 조금 놀랐죠?”“얘기 듣고 정말 귀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사실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직 끊지않은 엄마 전화번호로 자꾸 전화를 했거든요.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메시지 남기라며 녹음된 그 짧은 말을 수없이 들었죠. 그렇게라도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잠시 위안이 되었어요.”다시는 받지 않을 주인 잃은 전화기에 남겨진엄마의 목소리를 수없이 들으며 이 아들은 또 얼마나 그리움이 사무쳤을까. 영혼으로라도 아들 곁을 맴돌 엄마는 또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생각하니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 속에 엄마와 인터뷰했던 녹음 파일이 들어있어요. 다시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이 USB를그냥 가져요,”“그래도 되나요? 정말 귀한 선물인데 그냥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일부러 이렇게 연락 주시고 만나서 직접 전해주기까지 하셔서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죠?”“ 씩씩하게 잘 살아요. 엄마가 세상에 남긴 가장 아름다운 흔적이잖아요. 하나 뿐인 보물,귀한아들...”“ 저 울리지 마세요. 안 그래도 억지로 참고 있어요.”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청년이 환하게 웃었다.
인사를 나누고 일어서는데 청년이 작은 카드 같은 봉투를 한장 내밀었다.
“참, 이거 하나 드리고 싶어서 가져왔어요. 저희엄마를 기억해주시는 분이니까,,,”청년이 준 봉투를 열어보니 카드가 들어있었다.
카드 앞에는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기쁜 나무...희목”이라는 초록빛 글씨가 선명하게 써있었다.
“장례식에 와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라도 남겨야하지 않겠냐며 살아계실 때 엄마가 직접 그리고 쓴 카드에요. 그땐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도대체 이런 걸 왜 만드냐고 화를 냈었죠.
저희 엄마다운 작별인사였다는 걸 떠나신 후에야 알았어요. 장례식에 오신 분들께 드리고도 몇장 남아있길래 나오다 생각이 나서 한 장 가져왔어요. 고마움의 인사를 엄마마음으로 전하고 싶기도 했고...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평생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해요“.
청년과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타 시동을 건 후,손에 든 카드를 펼쳐 보았다. 정성스럽게 직접 쓴손글씨로 빽빽하게 적혀있는 글. 세상에 와서 스치듯 인연 닿은 사람들에게 어떤 작별인사를 남기고 싶었던 걸까. 단정한 글씨체로 적힌 그녀의마지막 인사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 지금 이 글을 보는 분,고마워요. 어떤 인연으로든 저와 만났고 또 저를 기억해주는 분이니까요. 제가 떠난 후 이 작별인사를 보시게 될 당신에게 저의 사랑을 전합니다. 그리고 많이 많이 행복한 날들을 살아가시라는 축복의 마음도 함께전합니다.
아침에 눈 뜨면 늘 고마움으로 하루를 시작하세요. 살아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은 오늘 하루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불행의 이유는 수많은 결핍때문이 아니라 한가지 이유입니다. 행복함을 수시로 잊는 슬픈 건망증.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매일 기억하며 살아가세요. 당신이 한 그루 나무처럼 뿌리 내리고 서서 인생의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을 살아가는동안 잊지 말아야할 한 가지. 제가 오십년을 넘게살다가며 겨우 깨달은 단 한 가지 행복의 비결은바로 “받아들임”입니다. 살며 만나는 모든 일들을 그저 다가오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살아있는 동안 누구나 때론 견디기 힘든 일이 찾아오죠.
밀어내거나 도망치지말고 온 마음으로 안으며 받아들이세요.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언젠가는 알게 될테니까요. 살면서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엔 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래요. 그러니 불안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세요. 그저 당신이 할 일은 매일 행복을 느끼고 고마워하며 매순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언젠가라고 미루지말고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저 마음만으로 행복하면 되는 것. 그 쉬운 정답을 저도 너무 늦게서야 깨우쳤어요. 그래요,너무 늦었어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떠나기 전 돌아보니 저는 참 행복한사람이었더군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두 손 모아 축복합니다. 참,이 말은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Life is good! …… From 기쁜 나무,희목-운전대에 올려놓은 두 팔에 얼굴을 파묻고 얼마쯤 있었던걸까. 톡 톡 톡, 누군가 차창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Are you OK?”창문을 내리니 머리가 희끗한 백인할아버지 한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시동을 건 채로 운전대에 엎드려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되어 차창을 두드렸던 모양이다.
“I’ m OK . Thank you!”낯선 타인의 눈빛 속에서 진심 어린 걱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마음에 화답하듯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울어서 붉어진 눈으로 웃어보이는내 마음을 마치 다 헤아린다는 듯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다. 옆에 주차된 차를 타고 떠나며 할아버지는 쳐다보는 날향해 손을 흔들었다. 힘내요,힘내! 말 없는 응원처럼 그 손짓에 괜히 힘이 났다.
가슴 먹먹한 슬픔이 눈물에 씻겨갔는지 맑은날 바다처럼 마음의 물결도 잔잔해졌다. I’ m OK.
그래, 괜찮아,다 괜찮아질거야. 휴우- 깊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고난 후 전화를 걸었다“엄마야.”“어! 왜?”갑작스러운 나의 전화에 놀랐는지 딸의 목소리에서 당황스러움과 의아함이 묻어났다.
“병원 검사 나왔어?”“안 그래도 조금 전에...”“뭐래?”“괜찮대. 걱정할 일 없고 다 정상이래.”“다행이다.”안도감에 나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처음이야.”“뭐가?”“엄마 많이 화난 후 처음으로 나한테 말 걸어줬어.”“그랬네. 미안해.”“엄마...엄마가 왜 미안해...그런 말 하지마...미안한 건...나야…미안해...엄마...정말 미안해.”전화기 너머 딸아이가 참았던 속울음을 터트렸다. 서운했다는 원망보다,그동안 마음고생했다는투정보다 그 울음소리가 더 시리고 아팠다. 얼마나 힘들었을까,가여운 내 새끼. 곁에 있으면 등을다독거리며 따스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미안해,엄마가 못나게 굴었어. 미안하다.
“울지마. 있잖아,엄마가 오늘 맛있는 저녁 만들어줄거야. 지금 장 봐서 준비할테니까 그 사람도집에 오라고 해서 다 같이 저녁이나 먹자. 우리 식구될 사람인데 얼굴이라도 제대로 봐야지.”“엄마...”“그래,아직도 쉽진 않아.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일게. 쉽지 않겠지만 나도 노력해볼게.:“엄마.…“대신 이거 하나만 약속해.”“응…“……”“뭔데?”“꼭 행복해.”“……”“ 알았지? 우리 딸 꼭 행복해야해. 엄마는...엄마는...너만 행복하면 돼.”톡 톡 톡. 누군가 창문을 두드리며 내 안부를 물어보듯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 앞유리위로 빗방울들이 그린 비꽃이 번졌다. 눈물을 스윽 닦아내주는 손길 같은 와이퍼를 켜고 급한 맘으로 빗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OFF였던 감정의스위치를 누가 슬며시 ON으로 켜줬는지 곡조도모를 콧노래까지 흘러나왔다. 빨리 장을 봐서 저녁을 준비해야지. 한동안 마음고생 심했던 가족들이 오늘은 모처럼 따뜻한 식탁 앞에서 서로 마주보며 환하게 웃을 수 있겠네.
상황이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가슴 한켠 무거웠던 무엇인가 사라진 자리가 후련하게가벼워졌다. 그 순간,마음 깊은 곳 저 너머 어디선가 내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나즈막히 들려왔다.
Life is good!창밖으로 스쳐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누군가의 미소에 나도 환한 미소로 화답해줬다.
‘그래요,나쁜 건 없어요. 그저 모든 게 다 인생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스쳐가는 나무들이 자꾸 말을 걸어오는,나무의 목소리가 마음의 귀로 들려오는 참 이상한 날이었다.
(몇달 후, 마흔 여섯번째 생일 아침에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첫 눈에 나를 사로잡은 사랑스러운 아기. 내 인생 최고의 생일선물로 세상에 온그 녀석의 이름은 매튜 Matthew. 딸이 말해주길, 어디선가 봤는데 그 이름 속에 담긴 뜻 ‘Giftof God’ 이라는 의미가 좋아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그 뜻을 속으로 몇 번 되뇌이다 혼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의. 선.물…)
당선 소감
행복한 기쁨이 내 마음안에 항상 그자리에
언제부터인지 의미 있는 짧은 글귀가 적힌 컵들을 하나씩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예를 들자면, 어디선가 보거나 들어봤음직한 긍정의 기운이 듬뿍 담긴 글들이다.
You can if you think you can.Let ti be. There will be an answer.Think happy. Be happy.Pray about everything. Worry about nothing. Love is all you need.
눈에 띄면 사기도 하고, 주위에서 선물도 받다보니 어느새 스무여개나 모였다. 아침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마음이 닿는 글귀가 적힌 컵 하나를 골라 따스한 차 한잔을 마시면 밝은 기운이 충전되는 것처럼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오늘 아침, 우연히골랐던 컵이 수상소식을 미리 예고라도 해줬나 싶다. Celebrate otday! Life si a gift.더없이 큰 선물을 받은 오늘, 온종일 기쁘고 설레인다. 그동안 몇 년째 한 편의소설도 쓰지 못했었다. 좋은 글을 쓰려는 열정,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씨앗 한 톨남지 않아 이제 다시 꽃을 피울 수 없나보다 했는데, 불현듯 떠오른 첫 문장으로시작한 글이 한번 멈추지도 않고 끝까지 저 혼자 흘러가더니 “선물”이 되었다.괜찮아, 괜찮아, 라고 다독여주는 누군가의 위로를 들은 듯 마음에힘이 차오른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불안해하며 사는데더 익숙해서 오늘이 주는 삶의 선물들을무심히 놓치고 살았는지 모른다. 여기 아닌 저기, 이것 아닌 저것, 이 일 아닌 다른 일을 통해서만 올거라고 믿었던 행복이나 기쁨이 먼 곳 아닌 내 마음 안 그 자리에항상 있었음에 눈 떠가는 요즘이다.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흘러가며 사는 잔잔한 즐거움이 새롭다.
당선이라는 귀한 상을 주신 분들께 큰고마움을, 축하한다며 봄꽃처럼 환하게
웃어준 이들에게 깊은 사랑을 전한다.
34회 문예공모전 단편소설 심사평
심사평 (예심) / 윤성희 소설가
올해로 네 번째 예심을 맡았는데 해마다 조금씩 즐거워진다. 처음에 심사를 할 때는 과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이야기만 한다고 해서 과연 소설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를 고민하지 않은 소설이 너무 많
았다.
그런데 올해의 작품들은 작년보다 훨씬 소설로 정제된, 그러니까 소설의 언어를 갖춘, 그런작품들이 많았다. 자서전 같은 소설도 많이 줄었다. 네 번의 예심을 하면서 느낀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비슷한 소재의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미주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문예공모이다 보니 소재가 반복될 수 있다. 공간과 환경이 소설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내가 있는 현재에서 조금만 더 넓게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다.
교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나 마약에 빠진 자식 이야기는 단골 소재이다. 거기에 한국에서 자란 부모와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의 세대갈등 등도 많다. 이런 이야기에서 조금 벗어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소재가 진부하다고
해서 그 작품이 진부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대부분 같은 소재를 같은 방식으로 다룬다. 다른각도로 소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면, 즉, 고민도 비슷한데 그걸 해결하는 방식도 비슷하다면그 작품은 진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낸다. 하지만 떨어진 분들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설을 쓴다는 것 그 자체는 그것은 누구에게 말할 수없이 행복한 일이니까.
심사평 (본심) / 윤흥길 소설가
결과적으로 감동과 재미 가운데 감동 쪽을 택한 셈이다. 당선작으로 정한 이진아의 ‘선물’은 말기암으로 죽어간 여류화가의 아름다운 최후에 줄거리의 방점을 찍고 있다. 초점화자인 화가의 행복한 말년을 통해 깨달은 삶의 비의를 자신의 척박한 이민생활에 적용하는 작중화자의 모습도 덩달아 승리하는 인생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본심에 오른 박심성의 두 작품 중 ‘체크무늬월터 KIM’과 러렌 황의 ‘모노드라마’를 가작으로 뽑는다. 아마‘ 체크무늬…’의 초점화자인 묘지 중개인만큼 독특한 캐릭터도 좀처럼 찾아보기어려울 것 같다. 한 고객을 상대로 연거푸 묘지를 팔아 결국 이장하게끔 만드는 중개인의 능청스러운 궤변과 별난 영업 수완이 빚어내는 웃음의 이면에다 섬뜩한 페이소스를 깐 것이 이 작품의 두드러진 미덕이다.
‘모노드라마’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다이얼로그로 발전하지 못하고 각자의 모놀로그로머물 수밖에 없는, 한 이민가정의 비극적 풍경을 담고 있다. 청소년 주인공이 구사하는 되바라진 언설과 도치된 가치관이 럭비공처럼 튀면서 콩가루 집안의 비극을 더욱더 심화시킨다. 읽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인데, 구성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는 것은 말하기 수법보다 보여주기 수법을 주로 활용하는 데 기인할 것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