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아만 가고 오곡이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겨레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오고 있다. 들뜬 마음으로 한가위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억지로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
9월 들어 아침 산책 공원길은 지난밤에 내린 찬이슬로 촉촉이 젖어 있으며 풀벌레들은 요란하게 아침의 고요를 깬다. 산과 들에는 들국화와 코스모스 그리고 억새풀들이 제철을 맞아 산들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그동안 지긋지긋하게 기승을 부리며 끈질겼던 잔서(殘暑)도 어쩔 수 없이 찬이슬에 내려 앉아 단풍지는 가을에 자리를 떠 넘기는 모양이다.
저녁 해질 무렵이면 서강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落照)의 붉은 노을이 이곳 워싱턴 주변의 능선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한가위 보름달은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혀준다. 참으로 나무랄 데 없는 계절이라 하겠지만 한편 실향민들은 섭섭한 마음 그지없다고 한다. 햇곡식으로 차례상 차리고 조상께 감사드리는 추석은 한민족(韓民族)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실향민들은 아직도 어린 시절 살던 북녘 고향을 마음대로 갈 수 없고 나를 낳아 주시고 키워주신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수많은 실향민 나그네들에게는 진정 눈물어린 한(恨)의 명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해마다 이때쯤이면 의식적으로 달력을 외면하면서 ‘언제 추석이었나’ 모른 척 지내는 사람도 있다.
슬픈 한(恨)을 달래며 방구석에 처박혀 TV에 나오는 가요무대를 보다가 아나운서의 첫 인사말 “멀리 해외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하고 인사를 하면 눈시울을 붉히기 일쑤이고 게다가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왕년의 가수가 나와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한숨만 늘어..”를 부르는 장면이 나올 때면 참았던 눈물이 왈칵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는 ‘에잇! 마시자 마시자’ 하며 양주 한 병 다 마시고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고향 가는 꿈속에 빠진다.
‘어린 나이에 떠난 고향 이제 늙어서 돌아오도다’ 라고 한 옛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서도 백발은 고쳐지지 않고 서로서로 얼굴을 몰라보니 어디서 오신 손님이냐고 묻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슴이 터질 것 아닌가. 고향 떠나온 지 반세기 지난 지금 찾아가본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몇몇이나 있을 것이며 약산 등대 거북바위 아래서 알밤 구워먹던 어깨동무들의 추억을 새겨 봤자 그 누가 맞장구치랴.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 이상 고향은 존재하지 않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추석 때면 울적해지는 가슴 속에 이제는 빛바랜 사진으로 향수(鄕愁)의 사진첩 속에 깨워져 있을 따름,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으련다.
실향민들이여! 이국 땅 머나 먼 타향에서 한가위 보름달 아래 정한수 떠 놓고 실컷 눈물이나 훔치며 옛 추억을 한가위 달에 띄워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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