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 그러니까 내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스테이션 웨건에 이런저런 잡화를 싣고 벼룩시장을 찾아다니며 파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미국 구경’도 할 겸 그 친구를 며칠 따라 다닌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어디서 장사를 잘하고 다음 장소로 가는데 지름길로 간다는 것이 그만 방향을 잘못 들어 산중에서 길을 잃었다.
캄캄한 밤중에 한참을 헤매고 보니 배고픈 것은 둘째 치고라도 자동차 개스가 달랑 달랑 했다. “이거 큰일 났다” 싶었는데 저만치 무슨 집 같은 것이 보여 가서 보니 집은 집인데 전등불도 다 꺼져있어서 빈집인가 싶었지만 우선 문부터 두들겼다.
그 때가 밤 12시 쯤 되었나? 그러자 집안에 불이 켜지더니 한 영감님이 문을 비스듬히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자다 일어났는지 속옷차림이었다. 길을 잃었다고 사정 얘기를 하고, 여기서 가까운 주유소나 프리웨이로 가는 길만 좀 알려 달라고 했더니, 그 영감님이 대답도 안하고 문을 닫고 들어갔다.
우리가 실망을 하면서 돌아서려는 순간 뒷 뜰에서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그 영감님이 반 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말로 가르쳐 주어도 모를 것이니 자기를 따라 오라는 것이다. 그 영감님을 따라 산길을 한 이삼십 분을 족히 달리니까 주유소가 있었고 그 옆에 프리웨이 입구가 나타났다. 낯선 동양 사람들이 나타나서 길을 물었는데 영감님은 자다가 일어나서 몇십분을 운전해 길을 가르쳐 준 것이다.
몇 년 전이다. 한번은 205 Freeway 내리막길에서 내가 깜박 졸아서 앞차를 들이 박았다. 받힌 차는 큰 컨테이너 트럭이었는데 그 차는 자기가 받혔는지도 모르고 그냥 가 버렸고, 나는 차 앞부분이 대파된 상태에서 정신이 절반 쯤 나가있었다. 마침 뒤에서 오던 차에서 누가 내려서 내가 다쳤는지 살피고 내 차를 밀어서 옆으로 대는 것을 도와주고, 911로 전화를 해서 경찰을 부르고, AAA에 연락해서 토잉 서비스를 돕는 등 그 밤중에 한동안 나를 도와주고는 떠났다. 너무 고마워서 전화번호를 물었는데 그 사람은 손사래를 치면서 그냥 떠났다.
미국에 살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밤길 빗길에 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난감해 하던 상황에서 어떤 모르는 사람이 도와주었다거나 복잡한 도시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던 경험들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미국 사람들의 몸에 배어있는 작은 친절이다.
내가 내 자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에서 몇십년을 살았어도 이런 친절을 베푸는데 매우 서툴다는 것이다. 작은 친절을 베푸는 그런 문화적인 기초가 내 의식구조 안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은 참으로 정이 많고 이웃에 도움을 주는 것에도 전혀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문화는 아는 사람, 나와 연관된 사람에게는 ‘과도할 만큼’ 친절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모르는 사람을 돕는 그런 훈련이 안되어 있는 것이다.
언론에 비추어지는 요즘의 미국 사회는 얼핏 보기에 비관적인 모습뿐이다. 크고 작은 범죄, 마약, 총기 사고 등등.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국 사회를 진단하는 데 있어서는 벨라(Robert Bellah) 교수와 견해를 같이한다. 종교 사회학자인 벨라 교수는 그의 저서 ‘Habits of the Heart’에서 두 기둥, 즉 “앵글로 색슨의 청교도 정신과 개인주의”가 미국을 떠받치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청교도 정신이란 근면 검소 친절의 생활 방식이며, 개인주의란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신을 말한다. 이러한 정신문화가 일반 시민들의 생활 속에 ‘작은 친절, 작은 선행’ 이라는 습관을 심어주고 이러한 작은 것들이 모아져서 위대한 미국, 강력한 미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항상 이 맘 때가 되면 크고 작은 자선활동을 하는 바쁜 손길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본다. 미국은 아직 건전하고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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