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시절 아버지를 따라 서울 종로 2가에 있는 탑골(塔骨) 공원에 가끔 들른 적이 있다. 그때는 파고다공원이라고 불렀는데 1992년 탑골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3•1 운동 발상지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조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친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한국 최초의 도심공원이다. 중학교 교사를 하셨던 아버지는 이 공원 팔각정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옹기종기모여 시국토론에 열중하는 노인들 사이에서 훈수를 두는 것을 즐겨 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 때 왜 노인들이 왜 이곳을 즐겨 찾는지를 알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내 자신이 70대 노인이 되어 몇 년 전 옛날 ‘향수’를 그리며 이곳을 찾았다. 공원은 많이 변했다. 옛날에 비해 아주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었다.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들어섰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노인들이 시국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토론장에 끼어들었다. 그들의 열띤 토론은 국회를 방불했다. 나는 중학시절에 이해하지 못했던 노인들이 이곳에 모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외로운 노인들이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다. 노인은 자기를 알아주는 노인들과 어울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탑골공원 주위에는 옛날에 볼 수 없었던 노인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이 여기저기 있다. 기독교와 불교기관이 마련한 무료급식소가 있다. 수 십 명의 노인들이 문 열기 30분 전에 줄을 서 있었다. 나는 한 곳에 들러 점심을 하면서 노인들과 친교를 했다. 어떤 노인들은 자식 손자손녀 자랑에 열을 올리는가 하면 어떤 노인들은 가슴에 맺힌 한(恨)을 다른 노인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무료급식소 이외에 노인을 위한 음식점, 이발소, 까페 심지어 노인을 위한 극장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노인들이 끼리끼리 모여 인생을 나름대로 즐기는 것이다.
동료교수가 몇 년 전 서울 사직동 한 갤러리에서 교수 은퇴기념 작품전을 했는데 리셉션에 들렀다. 하객들은 축하기념식이 끝나고 간단한 음식과 다과를 들면서 교제를 했다. 하객 가운데 서로 아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불청객 노인들이 들어와 음식을 들면서 작품에 대한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갤러리 관리인은 이 불청객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는지 나가도록 은근히 종용했다.
이런 일들은 문화 관련 세미나, 심포지움, 토론회장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불청객 노인들은 다과를 든 후 모임에 참석하여 조용히 경청만 할 때도 있지만 전혀 관련도 없는 의제의 질문을 던져 장중을 놀라게 하거나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서울 중심가 한국프레스센터나 상공회의소 등 세미나가 빈번히 열리는 곳에 가면 이런 단골손님을 쉽게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노인들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5일자에 ‘맥도날드의 자리싸움’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한인노인들이 즐겨 찾는 플러싱에 있는 한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에 일어난 매장측과 한인 노인들 사이에 일어난 보기 드문 ‘분쟁’을 소개했다. 아침이면 몇몇 한인노인들이 여기저기 모여 커피 또는 다른 간단한 식단을 들면서 여러 시간 동안 교제를 나누는 공간이다. 그런데 매장측은 한인노인들이 거의 하루 종일 머물러 다른 손님들이 자리가 없어 그냥 돌아간다고 불평, ‘주문한 식음료를 20분 안에 끝내 달라’는 안내문을 게시하고 시간이 많이 경과한 고객들에게 나가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인들 끼리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같은 것이다.
내 자신도 새벽예배 후 가끔 다른 분들과 커피 가게나 햄버거 업소에 들러 오랜 시간동안 담소를 나눈다. 미국노인고객들도 오래 머물러 있기는 마찬가지다. 매장 주인들이 노인들이 갖고 있는 외로움을 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영업에 지장이 있다고 하지만 ‘노인봉사’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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