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 헨리 8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한다. 헨리 8세는 1509년부터 1547년까지 38년간 영국을 통치한 국왕으로서 조선의 폭군 연산군 후기와 비슷한 시기에 재위한 폭군이다. 헨리 8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두변째 왕후 앤(Anne)과 세번째 왕후 제인 씨모(Jane Seymour)를 빼 놓을 수 없다. 헨리가 영국의 국교(Anglican Church)를 창시하여 자기 자신을 교회의 장으로 임명한 것은 당시 왕후 캐서린과의 이혼을 선언하고 앤과 결혼하기 위함이었고, 삼년 후 앤을 참수에 처한 것은 제인과 결혼하기 위함이었다면, 여자를 취하기 위해서 이렇게 엄청난 일을 감행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이 인간사의 현실이었음을 개탄한다.
앤과 제인의 미색과 매력이 헨리의 이성을 이렇게 무너뜨릴 정도였단 말인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앤은 헨리의 딸(훗날 엘리자베스 1세) 하나를 생산했을 뿐, 아들 후사가 없었다. 앤은 조급한 마음에 아들을 갖기 위해서 그의 오빠와 동침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제인은 앤의 시녀로 앤과 가까이 있어서 헨리와 자주 대할 수 있었다. 헨리는 제인을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제인은 헨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앤이 오빠와 함께 참수형에 처해진 것은 오빠와의 근친상간 혐의에 의한 것이지만, 앤을 처형한지 11일 만에 제인과 결혼한 정황으로 보아 앤의 처형은 제인과의 결혼을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짙게 한다. 진실은 알 길이 없다. 헨리만이 알 일이다. 제인은 결혼 다음해인 1537년에 아들(훗날 에드워드 6세)을 생산한다. 헨리는 제인 만이 진정한 영국의 여왕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제인은 산후 후유증으로 해산 12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헨리의 왕후 6명 중 제인 만이 헨리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헨리가 후세대에게 준 교훈은 무엇일까? 이성에 대한 갈망(욕정)은 여하한 일도 감행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함과 동시에 욕구를 충족한 후에는 그 갈망은 뜬구름처럼 사라진다는 이치를 확인시켰다고 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나 ‘인심조석변(人心朝夕變)’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 교훈일 것이다.
헨리가 사망한 1547년에는 그의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6세가 10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지만 그의 이복누이, 엘리자베스 1세가 에드워드가 16살 어린 나이로 사망 할 때까지 대리청정을 한다. 1558년 사망한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정식 계승하여 향후 45년간 영국을 통치하여 세계의 최강국으로 이끌어 낸다.
보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던 연유로 탁월한 통치력을 발휘한 엘리자베스 1세를 갖게 된 영국의 행운이야 말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스페인이 세계 최강국으로 유럽을 지배했다. 그들의 함대는 무적함대라 불렸다. 이 함대는 1588년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함대에 의해서 전멸됨으로써 스페인은 세계 최강국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의 영국 국빈 만찬장에 박 대통령이 앉은 자리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벽에 여왕의 초상화를 걸었다고 한다. 영국 황실의 세심한 배려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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