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홍구라는 성공회대 교수가 ‘일본군 장교 출신 7 년간의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유신’이란 책을 출간하고 한겨레신문에 크게 실리며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기사가 나왔다. 소개 글을 보니 한 교수는 유신시대에 10대,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 20대라고 하니 아마도 50세 중반의 나이인 듯싶다.
역사를 보는 시각이 각각 다르니 박정희 씨의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평가는 그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썼다고 생각 할 수 있고, 비평도 할 수 있으니 나는 박정희 씨의 대한 그의 시각에 시비를 따질 마음은 없다. 다만 ‘친일파’ 비난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보고 싶다
자주 친일파 이야기가 나오면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야기 하는데 프랑스는 4 년 2개월의 점령이었고 한국은 통감정치 시기까지를 생각하면 그의 열 배인 40년이었다. 그리고 초기 5년간의 항거는 프랑스를 능가하고 3.1 운동도 을사보호조약 14년 후에 일이다. 그만큼 항일운동이 대단했고 우리 민족혼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인도는 주민 만 명 당 영국인이 한 명이었는데 한국은 일본인들이 20만 명이 넘는 백 명 당 한 명이었다는 사실 속에서 말이다.
박정희 씨는 식민지 지배가 오래 동안 지난 후에 태어났다. 다시 말하여 박정희 씨는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서 태어나서 막혀진 언론, 뉴스 속에서 일본 선생, 일본 파출소 순경, 모든 관공서의 일본인들 속에서 배우고 자랐다. 당연히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신분 향상이 목표이었지, 외부와 차단 된 우물 안 개구리로서 한국의 독립이란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 보자. 물론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있기는 했었으나 대부분의 목사들도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를 했고, 박헌영은 지하 활동 항일이 아니라 숨어 버렸고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황국 신민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소위 전향서를 쓰고 숨죽이고 살았고 미술, 음악, 문학, 교육, 언론등 모든 분야에서 이름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협조하고 살아야 했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만주에는 이미 광복군이니 항일 군대이니 하는 것은 없었다. 김일성은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 초급장교 노릇을 했고, 무정 방호산 같은 사람들은 중공군이 되어 장개석 정부와 싸우고 있었고, 임시정부 조소앙 씨가 미국에 군대를 만들게 돈을 달라고 하자 미국은 프랑스 망명정부처럼 국민이 지지하는 군대를 가지면 도움을 주는 것이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인데 군대도 없는데 우리보고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냐 하면서 “한국은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신탁 통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 씨는 1940-42년 만주 사관학교, 1942-44년 일본 사관학교 편입학, 그리고 장교로서는 1944년부터 1년간 만주에서 복무했다. 그 정도를 가지고 친일파이니 일본 장교 출신이니 하면서 매도하는 것은 글 속에서만 살고 시대 상황은 생각 안하는 어설픈 학자가 아닐까.
이제는 제발 을사보호 조약, 한일 합방시대의 매국적 친일파와 박정희 젊은 시대의 사람들의 삶과는 구분해야 하며 또 국민 대통합, 그리고 향후 남북통일 이후의 세대들의 갈등을 피하기 위하여서도 그들을 통째로 묶어서 친일파로 매도는 안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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