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 부터 104년 전,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는 만주의 여순 감옥에서 일제에 의하여 사형을 당하셨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남자다운 대한의 남아를 뽑으라면 반드시 안중근 의사를 당연히 첫 번째로 꼽아야 할 것이다.
당당한 체구, 넓은 양미간, 꽉 다문 두터운 일자 입에 팔(八)자 수염, 단호하고도 숙연케 하는 표정이 사진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외모 뿐 일까? 전해져오고 있는 일화는 우리를 더욱 숙연케 한다.
1909년 봄 조선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문 계획이 발표되자 안 의사는 동지들과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는 피의 단지 동맹으로 결의를 다진다. 이로 인해 안 의사의 트레드마크인 손도장이 탄생한다.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3발의 명중으로 이토를 쓰러뜨린 안 의사는 당당하게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체포당한다.
다음해 1910년 2월 14일, 일제의 군사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안 의사는 “동양평화를 위한 전쟁에서 적을 사살한 것이다. 일본법에는 사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은 없는가?"라고 되물어 재판정을 아연케 한다. 이러한 안 의사의 단호한 당당함은 결코 돌연은 아닐 듯싶다. 안 의사의 선조를 추적해 올라가 보면 고려 충렬왕 때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현재 풍기 소수서원에 모셔진 안향으로 이어진다.
사형이라는 결말을 향해 형식적인 재판절차를 거치는 아들 중근에게 보낸 그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서릿발 같은 가르침은 과연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는 수긍에 이르게 된다. “네가 어미 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한 집안의 전통과 가정교육을 되돌아보게 하는 교훈적 대목이다. 그러나 막상 안 의사의 정신적 자세와 국가관은 묻혀 있는 느낌이어서 안타까움이 남는다.
안 의사는 호쾌한 명필로도 너무나 유명한데 안 의사의 의기에 감복한 간수들에게 써준 유묵에 의사의 의기가 잘 묘사되고 있다. “견위수명(見危授命나라가 위태로우면 목숨을 바쳐라)"은 안의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준 표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보다 400여년 전 임진왜란의 마지막 노량해전을 앞두고 올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즉무감(死則無憾 이 원수를 없앨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의 마지막 기도가 생각난다. 글자만 다를 뿐 두 위인은 하나같이 나라라는 공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의기를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였다.
오늘날 우리 동포사회에는 무수한 단체가 있는데, 단체는 공(公)이며 공은 나(個人)보다 크고 우선해야 한다. 따라서 건전한 사회와 아름다운 단체의 운영을 위하여 나의 얼굴, 나의 이름은 내려놓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공의를 위해서라면 하나 뿐인 목숨을 선뜻 내려놓던 위대한 실천적 교훈이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일을 맞이하여 동해병기의 성취를 전환점으로 모든 한인단체의 책임자들이 공적인 대의명분을 앞세우는 단체운영의 아름다운 전통을 뿌리내리는데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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