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염소 한 마리가 머리에 종기가 나 시름시름 앓고 있어요.” 철없이 순진하기는… 쯧쯧! 남친 앉혀 놓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병난 염소 이야기라니! 세상엔 로맨틱한 소설, 기막힌 음악, 감동적인 그림들이 쌔고 쌨건만 내가 꺼낸 이야긴 병난 염소 이야기였다. 그것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당시 우리의 상황 때문이었나?
여하튼 반세기 전, 호랑이 담배 태던 시절, 아무리 보태고 늘린다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던 우리 울타리 속의 인간 식구는 부모 자식들 외에 할머니, 삼촌, 고모, 등등하여 항상 한 다스가 넘어 돌았다. 하지만 동물 식구는 단연 인간 식구를 능가하고도 남았다. 먹을거리에 하등 공이 없는 개와 고양이는 빼고도 말이다. 토끼만도 늘 열 마리가 넘었으니까. 그 대 식구가 어울려 산다는 것 역시 간단 단순한 노릇은 아니다. 생존을 위한 전쟁은 항상 울타리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
그중 사람 먹거리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 해도 염소가 아니었을까? 특히 우유를 제공하는 암염소 말이다. 이 뿔 달린 가축은 “매해해해해…”울어 싸면서도 온 식구의 우유를 매일 아침 제공했다. 그 중 한 마리가 머리에 종기가 나 시름거렸던 것이다. 사람도 웬만큼 큰 병 아니면 의사 찾아가지 않고 낫기 기도하던 시절인데 염소 아프다고 동물병원 끌고 갈 정도로 우아 고급스레 사는 삶은 아니었다.
“내가 봐 줄까?” 남친(남자친구)이 물었다. “엉? 염소를?” 놀란 내가 되물을 밖에. “이래 봬도 의사 지망생 아니냐?” 틀린 소린 아니다. 그때 남친은 수의대가 아닌 (인)의대 졸업반. “하지만 사람이 아니고 염손데요?” “그러니까 말이지. 사람이라면 내가 손댈 수 없지만, 염소라면 해볼만 할걸.” 그렇게 해서 남친은 해부학 교실용 해부기구(?)를 싸들고 우리 집으로 염소 왕진(?) 왔다. 우리 집 인간 식구들은 속으로야 어떻든 겉으로는 모두 ‘그래 잘 왔다, 어디 고쳐 봐라,’ 하며 종기 난 염소를 내 주었다. 동생 숫자 역시 넉넉하게 둔 나는 ‘넌 염소의 이 다리, 넌 저 다리 잡아라,’ 해 가며 남친의 수술 조수역(?)을 시켰다. 다행히도 염소는 반항 없이 수술을 잘 견뎌냈고 별 탈 없이 건강을 되찾아 멀쩡해졌다. “와, 염소를 그렇게 단방에 고쳐? 보통 인간은 아닌가 보네! 하늘의 별도 따다 주겠네!” 더위에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 내 가슴.
“염소가 글쎄 말짱히 나았다니까요. 신통하죠?” 남친 한테 화끈하게 달고 녹은 내가 경과보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낫지요? 먹인 약도 없는데…” “워낙 사람보다는 동물이 더 잘 낫게 마련이거든. 내가 한 거라고는 상처난 부위 째고 고름 짜낸 후 다시 덮어준 게 단데, 뭐.”하는 남친의 말에 나는 더 뿅 갔다. 어쩌면 저렇게 겸손까지 할 수가… 하고. ‘이래 뵈도 내 손이 약손이고 명의의 손이다,’ 하며 허풍 늘어놓는다 해도 난 이미 갔다. 남친의 말이 100% 사실이긴 하지만 이미 눈에 깍지가 씌워진 마당에 무엇이 보이랴? 더더구나 인생이라는 것이 나이 따라, 시절 따라, 특히 20대라는 호르몬에 속아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나 같은 둔치가 어찌 깨달을 수 있었으리오? 어쨋거나 병난 염소는 남친을 우리 집으로 자연스레 발걸음 하도록 발판을 만들어 준 셈이다.
“딸들만 수두룩한 집안의 외아들이다, 이대, 삼대독자다, 네가 멋모르고 그러니 다시 생각해 봐라…,”해 싸며 반대에 반대를 거듭하던 엄마도 염소 덕분엔지 누그러들었고. 아니, 남친에 눈이 멀어버린 딸이 이제는 뭐 란들 가망 없다 싶었던지도 모르지.
결국은 다이아몬드 가락지 대신 20대의 호르몬, 플러스 병난 염소 덕으로 맺어진 우리의 풋사랑이 되었다. 이 또한 호랑이 담배 태던 시절, 한여름 밤의 꿈 이야기가 돼 버렸으니….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