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새해의 1월도 다 지나가고 있다. 몇 년 만에 내린 폭설은 며칠간 사람들을 다 집에 꼼짝달싹 하지 못하게 묶어놓고 자의 반 타의 반 동면(冬眠)(?)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폭설이 멈춘 다음날 열어 제낀 창문의 커튼 밖으로 햇볕이 수놓는 은은한 은빛 반사가 주는 무언의 메시지 앞에 서 있는데 불현듯 머리 속에 한 선율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다니던 학교의 오케스트라에서 비올라를 치던 나에게는 두명의 형제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켄’ 이라는 친구는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으로 첼로를 쳤으며 통통한 얼굴 생김이나 체구는 꼭 슈베르트를 닮았고, “마이클”이란 친구는 유대계 미국인으로 바이올린을 쳤으며 깡마르고 곱슬거리는 브라운 헤어는 멘델스존을 빼 닮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음악 삼총사로 불렸다. 손에는 쉴러의 시집을 들고 다녔으며 학교에서는 세 사람의 작곡발표회를 열어줄 정도로 음악에 정진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날은 눈이 발목까지 펑펑 내리는 1월의 한 겨울 밤, 우리집 차고에 모여 차고 문을 활짝 열고 함박눈 내리는 밤의 정취의 한 복판에서 시간을 정지시킨 채 트리오 연주를 시작한다.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 “1월” (The Seasons). 이 작품은 12곡으로 된 피아노 소품집으로, 니콜라이 버나드가 각 열두달에 각 다른 시제(詩題)를 붙여 12개의 피아노 소품을 작곡해달라는 커미션에 의해 탄생한 작품이다. 1월의 시제는 알렉산더 푸쉬킨의 “화롯가에서” (At the Fireside)이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January]
A little corner of peaceful bliss,
The night dressed in twilight;
The little fire is dying in the fireplace,
And the candle has burned out.”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작곡하기 위해 황혼이 물든 해질녘 타오르는 작은 불꽃과 촛불을 바라보며 무한한 행복의 모퉁이에서 악상의 나래를 펼쳐나갔을 것이다. 타오르는 작은 불꽃의 몸짓과 그로부터 파생되고 투영된 단상(斷想)적 연결고리는 왜 “1월”의 작품을 이루는 멜로디들이 온전한 매듭이 지어지는 컴플릿 멜로디(complete melody)가 아닌, 잡다한 짧은 조각 멜로디(fragments) 들로 이루어져 있는지의 음악적 이해로의 해법의 열쇠를 제공한다. 또한 이 조각 멜로디들은 어떠한 단상에 대한 이미지를 넌지시 암시할 뿐 어떠한 정의(定義)도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곡은 다른 차이콥스키 작품들에서 경험해 볼 수 있는 애절함, 그리움, 심장을 가르는 호소력, 격렬함, 격렬함 후에 오는 망연자실함, 흐느낌, 침묵의 환희 등 뚜렷이 드러난 칠색 무지개가 아닌, 가물가물하면서도 소박한 소리로 작곡 되어 있다. 희미한 무지개처럼. 눈으로 덮인 온 세상, 해 저문 적막한 저녁, 벽난로 옆 모퉁이 피아노에 앉아 보드카 한잔으로 몸 덥히며 소박한 영감의 카르마에 빠져 차분히 건반을 더듬는 그의 모습이 아련히 보이는 듯 하다. 시간의 여행- 어느덧 반짝이던 눈도 어둠에 묻혀버릴 때, 벽난로 모퉁이 가에 앉아 있는 나, 타오르는 작은 불꽃을 바라본 후 이내 서재로 향해 오래 된 악보 한권을 손에 쥐고 피아노로 향한다. 지금쯤 그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파편같은 생각들이 불꽃 속에 편안하게 타 오른다.
<최영권 성프란시스 한인성공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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