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방황하는 나의 정신의 위치, 시간을 금쪽 같이 아껴 써야 하는 근황, 정신적 풍요를 구가하며 만고강산 유람하며 풍류를 즐기시던 옛 선비들의 노경(老境)이 부럽다.
지난 금요일 오후부터 폭풍에 휘날리던 눈, 조용히 잠자는 이 깨울까봐 밤사이 소리 없이 사뿐 사뿐 내리더니 시계(視界)의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 버렸다. 눈이 쌓임에 따라 주차장에 나열돼 있는 차들, 높고 얕은 차, 큰차 작은 차, 길고 짧은 차 등등. 눈을 흠뻑 뒤집어 쓰고 나목(裸木)들의 키가 작아보이도록 눈은 계속 내리니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설경을 연출하고 가슴 시리도록 끝이 보이지 않은 설원을 연상케 해 준다. 본의 아니게 집안에 들어 앉아 한숨 돌리며 구상을 하다가 그림이나 그리지, 한 번 앉으면 밤샘을 각오하고 덤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지. 지난 주말, K장로님 댁을 기습 방문해 얻어 온 표주박 몇 개, 어떤 것은 나무 밑에 뒹굴다 여름 가을 내내 덤불속에 파묻혀 자작화를 그려놓은 것도 있다. 그것을 잘 이용 가을의 들국화로 변형 시키니 되살아났다. 또 하나에는 동매화(冬梅花)를 그리니 간결하고 그런대로 자화자찬하고 싶다.
금요일 밤 그렇게 요란하던 바람은 잠잠해지고 토요일 하루 종일 사뿐사뿐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간간이 내려다 보기도 하다가 표주박 얻어올 때 약속한대로 K 장로님께 그림 그려 드리기로 했으니 그림이나 그리자 그런데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나, 잠시 모색하고 있다가 인품에 맡는 선경(仙境) 노송(老松)이 우거진 곳에 암자를 그리기로 하고 시작하다 보니 어느덧 설광에 주위가 환해졌다. 일요일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빨리 일어나 햇빛을 보다 많이 받는 곳으로 군자란 옮겨야지 생각하고 거실로 가니 변화가 생겼다. 저쪽 방에 있어야 할 회전의자가 이쪽 거실로 와 있다. 포치로 나가는 문과 90도 각을 이룬 구석에 세워둔 피나무 여인의 조각상, 등에 아이를 업고 물동이 이고 걸어오는 아름다운 여인 옆에 의자를 갖다놓고 맞은 편 반다지 옆에 역시 세워 둔 머리에 갓 쓰시고 죽장 짚고 마중 나온 듯 웃음 머금고 서 있는 할아버지 조각상 옆에 친절하게도 물 컵과 케이크 접시까지 갖다놓았다. 이번이 두 번째이다.
약 6개월 전 함께 TV 시청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어나더니 얘기를 하며 할아버지 앞으로 다가간다. 영어로 간간이 한국말 섞어가며 하도 오랫동안 얘기하고 있기에 무슨 내용인가 귀담아 들어보았다. 특별한 내용은 없고 시공간(視空間)을 넘나들며 연설을 하고 있다. 얼마나 가슴 속이 답답했으면... 인간의 감정은 수시로 요동치며 변화무쌍한데 고산준령도 격동치는 파고(波高)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 인생항로라면 체념의 철학도 인내의 고통 또한 감수하고 방황할 필요 없다.
노경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요즘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고 재주 많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데 나는 왜 문어발 뻗듯이 사방팔방으로 손을 뻗고 있는지 그러나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발동하는 것이어서 작심삼일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임경전 은퇴의사 실버스프링,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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